라이프로그


당 블로그 사용 설명서

1. 야만행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2.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혼잣말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3.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오독하는 댓글(트랙백 포함)은 일단 용납됩니다. 단, 자신이 단 댓글이 '편견과 선입견의 노예'라는 딱지가 붙여져 박제되어 주인장이 보내는 조소를 받는 처지가 되는 것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4. fact 와 basis, reference 없는 주장도 일단 용납됩니다. 하지만 reference가 있는 주장에 그 주장이 반박될 경우 '검증되지 않은 속설의 맹목적 추종자'라는 푯말이 걸린채 박제되어 비웃음을 사는 꼴을 보셔야 합니다.

5. 이외 기타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지 않는 분들은 절대 환영받지 못합니다. 과학적 방법론만이 현상을 설명하는 유일한 사고방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과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중학교 과학교과서 첫 페이지를 읽고 다시 주장하세요.

6. 기타 비논리 또한 용납되지 않습니다. 주인장이 심심하면 비논리인 이유를 달아드리려 노력하겠지만, 아니면 삭제되거나, 비논리를 방문자분들께서 구경하시라고 박제할지도 모릅니다.

7. 본문에서 주장하는 논의를 바탕으로 정반합의 과정을 함께 걸어가시는 분들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참 쉽죠?


수도 이전 일상의 口丁乙

평소에 방문자도 얼마 없는 블로그지만, 그래도 혹시나 찾아주실 분들을 위해서 블로그 이전에 대해 안내합니다.
오늘부로 http://dicrence.tistory.com/ 로 블로그 옮깁니다.

이글루스 포스팅을 백업해주는 프리덤이란 사이트에서 몇 번 시도해봤었는데, 한 달 전에는 잘 안되더군요.
하지만 오늘 다시 들어가보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서 블로그를 티스토리에 맞게 변환하는데 있어 에러메시지가 전혀 뜨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댓글 중에 몇 개가 빠지긴 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지요.=_=;;

하여, 오늘 부로 이글루스에 자리잡았던 변방의 얼음집은 자연스럽게 풍화되로록 방치하고, 티스토리에서 새롭게 살림 폅니다. 빙하기에는 살기 좋은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법이지요. =ㅂ=

대항해시대 온라인 무료화!?!? 일상의 口丁乙

자세한 내용은 요기


으흠. 최근에 딱히 하고 있는 게임도 없어서 가끔 오락실에서 태고의 달인10이나 뚜드리고 있는 판인데, 한 번 진득하니 실로 오랫만에 온라인 게임이나 잡아볼까요....=_=;; 오게임 이후로는 온라인 게임은 손 끊었었는데......
지금부터 컴퓨터 포맷할 건데, 그 동안에 생각 좀 해 봐야겠군요. -_-a

"군대는 노가다하라고 있는 겁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그러기왕이면 공구리칠 때 군대를 쓰는 걸 선택하겠어.


......야잇 $!@#$!@#$!@#$ (이하 자주관제)
게다가 저런 대낮에 공업용 알콜 물에다 섞어먹는 소리에 '그건 아니지~~!!'라고 딴지거는 고위인사도 없어. 명색이 "노가다 직업 무시하지 말라능!! 고용창출효과 장난 아니라능!! 그래서 일자리 100만개 창출 발표할 때도 당당히 집어넣었다능!!!" 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왜 저런 말에는 입을 닫고 있나?! 일자리 창출을 대놓고 안하겠다는데, 경제사범으로 집어넣어야 하는거 아님?
 
점점 이 정권을 몰고 가는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는 내가 아는 '보수'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나는 부족하나마 보편적인 보수의 기준을 가지고 이야기하려 노력하는데, 대체 이들이 말하는 보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 사람들은 어디 머나먼 옛날 어느 은하계에 존재하고 있던 '보수'를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라엘리안들이랑 친구먹어도 되겠다. (쳇) 

디플레나 인플레나 소시민들 등골 빠지는 건 똑같다. 막장경제론

인플레 상황에서는 월급보다 이자율이 더 오르니 빚 갚기 팍팍해진다.
디플레 상황에서는 이자율보다 월급이 더 깎이니 빚 갚기 더 팍팍해진다.
올라갈 때는 '니 월급 빼고' 다 올라가고, 내려갈 땐은 '니 월급도 함께' 다 내려간다.
결국 죽어나는 건 매일 매일 힘겹게 일하며 사는 죄밖에 없는 소시민들 뿐이다.

경제성장률? GDP? 확 올려준다는 사람 있으면 그 때는 좋은 말로 들릴진 모르지만, 올리겠다는 내용을 잘 들어보자. 카오스로 몰아간 다음에 올리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소시민의 이익을 깨먹자고 말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그렇게 정부를 욕하면서, 왜 선거때만 되면 다들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국가주의자가 되는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소시민들에게 진짜 이익이 되는 사람은, 무리한 수를 쓰지 않고 견조한 국가정책을 통해 안정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신중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또 인기가 없지. 이걸 알기 때문에 이런 정치인도 못 크는 거고. 그래서 현실은 시궁창이다. 

님들 지금 무신론자 무시하나요? 일상의 口丁乙

뭐? 라엘리안이 무신론자들의 모임이라고?

위 기사는 인간복제를 했다고 허풍치는(물론, 근거가 없으니 아직까지는 허풍) 내용인데, 허풍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 기사의 요지 자체는 그냥 넘깁니다. 
문제는 기사 중간의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배후에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있기 때문이다. 90여개국에 회원 6만5000여명을 두고 있다는 무신론단체다. ' 라는 말이에요.

일전에 꿈도 희망도 없는 비종교적 회의주의자 인증을 깐 사람으로서, 라엘리안을 무신론자와 동급으로 놓는다는 것에 매우 역겨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무신론에 대해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군요. 무신론자는 그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믿지 않지만 다른 도그마는 믿는 사람들이 분명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일 망정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종류의 도그마에도 경도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는 도그마의 근원적 속성때문인데요. 도그마가 되려면 증명되지 않은 사실 내지 개념을 '있다고 치고'(즉, '믿고') 그 다음 논의를 이어가는 체계이거나, 아니면 일부만 증명된 것을 두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개념으로 상정해야 하지요. 바로 저 '있다고 치는' 것의 대표 주자가 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인격신을 상정하는 체계가 바로 현대의 종교이지요. 따라서 무신론자가 종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도그마적 속성 때문이지, 종교를 대놓고 배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무신론자라면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도그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엘리안들은 '외계인'이라는, 명백한 도그마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 무신론자일 수 없지요. 외계인의 존재는 증명된 적이 없는 개념이에요. 물론 칼 세이건의 '컨택트'에서 나오는 말처럼, '이 넓은 공간에서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이기 때문에 저도 외계인의 존재를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정도로는 생각하고 또 실제로 존재하면 재미있겠다고는 생각하지만, 외계인을 '있다'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아직 증명할 수 없는 사고이기 때문에 도그마입니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뭐 답이 없죠. 이런 자들과 무신론자를 도매급으로 넘겨요? 워워워. 무신론자들을 대체 뭘로 보는 겁니까?

게다가 이 기사는 더 악질적인 요소를 숨기고 있어요.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일단 라엘리안들을 수식하는 말이지만, 라엘리안을 무신론 단체로 봐버리면 무신론자들은 종교나 생명윤리는 다 내버리고 매일 인체실험이나 하는 그런 변태중의 상변태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버린 건 맞지만, 생명윤리까지 버린 건 아니거든요? 그저 남들과 다른 생명윤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기독교와 개신교, 이슬람교 내지 다른 종교들이 각각 다른 생명윤리를 가진 것처럼 말이죠.

이 문구는 다른 의미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데요. 종교나 생명윤리를 같이 쓰는 걸 봐서는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단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물론 지금 종교계에서 생명윤리를 중시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종교만이 생명윤리를 주장하고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파고 들어야 할 듯 합니다. 뭐, 이 문제는 아직 저도 명확한 결론을 내린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제기만 하고 넘어가지요.

'종교를 믿는다'는 말을 가볍게 하면 안 되는 것 처럼, '무신론'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최소한 왜 자기가 종교를 믿는지, 왜 무신론인지 정도는 남에게 설명할 정도는 되어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종교야 상대적으로 이런 설명을 할 부담이 적지만, 무신론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왜 무신론인지를 설명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고, 실제로 세심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남이 상대방을 '무신론자'라고 말할 때 또한 그런 정도의 주의는 기울여여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 점을 망각하면, 진짜 무신론자를 옆에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수가 생깁니다. 바로 이번 기사처럼 말이죠. 이것 참, 식사한 직후에 이런 문구를 보니 속이 안 좋아지는군요. =_=+


추신 : '있다고 치고'. 이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속해있는 체계나 직업 등속이 진짜 실체가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지, 아니면 '있다고 치고'를 기반으로 하는지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후자라면, 도그마에 빠져있다고 봐도 일단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 도그마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실제 그 도그마를 통해 어떤 효과를 본 사람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있다고 친 것''있는 것'으로 바꿔주는 것은 아니지요. 이 과정은 오직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족 : 이런 기사가 아침 댓바람부터 버젓이 포탈 헤드라인에 떠있는 현실에 절망하는 중이므로, '일상의 口丁乙' 카테고리로 분류합니다. 땅땅땅.


나는 골프를 치지 않지만, 골프칠 권리는 인정하겠다.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이미 블로그는 dicrence.tistory.com으로 옮겼습니다만, 그래도 일단 병행할 생각입니다. 티스토리로 옮긴 것은 제가 참가하고 있는 메타 블로그 닥블에 선별적으로 글을 보내기 위함이니, 그 곳에 보내지 않을 글은 이곳에 올릴 예정입니다.>

민주당 의원 몇몇 분들이 외유성 골프를 치다 딱 걸린 모양이다.
효율성을 금과옥조로 삼는 나로서는, '어차피 골프를 칠 거면 더 싸게 먹히는 외국에서 치는 것이 차라리 낫겠지'라고 생각하는데, 효율성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으니 이 쪽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따라서 좀 다른 관점에서 이 국회의원들이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지 생각해볼까 한다.

'회기중에 외유성 골프를 치러 갔기 때문에 잘못이다'라는 주장은 얼핏 보면 '회기 중에 다른 일을 하러 나갔다'는 논거만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기 쉬우나, 사실은 여기에 '외유성 골프는 나쁜 것이다'는 논거가 같이 붙어있다. 이 논거가 삽입되지 않으면 '회기중에 다른 일을 하러 나갔다'는 것 만으로 세찬 비난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거만 가지고 잘못을 주장한다면, 회기중에 지역구로 내려가 지역 행사에 참여하거나, 심지어는 봉사활동을 가는 것 또한 잘못이 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 국회의원을 비난하는 여론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런 주장은 역시 설득력이 없는 듯 보인다. 따라서 회기 중에 다른 일을 하러 나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생각이다.

이제 문제는 '외유성 골프는 나쁘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런데, 정말 나쁜가? 이 질문에 대해,이번 사건에 대해 비난하는 측에 있는 사람들은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회기 중에 다른 일을 하러 나간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럼 그 '다른 일'이 어떤 일이냐에 따라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 있다. 비난하는 측에 있는 사람들은 골프는 명백히 비난할 만 하다는 가치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당연히 이에 대한 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외유성 골프는 나쁘다'는 생각에 따로 설명이 필요없기 때문일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외유성'과 '골프'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골프는 '외유'의 구체적인 한 형태이며, 외유와 골프를 묶어서 생각하면 민주당 의원들이 비난받는 이유가 하필이면 골프를 쳐서인지, 아니면 외유를 나간 것 때문인지를 명확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골프'에 대해 생각해보자. 골프가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인식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식 하에 외유성 골프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골프가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인가? 아니면 골프를 하는 사람들이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여 그 여파로 그들이 주로 하는 운동인 골프가 계층간 위화감의 상징이 된 것인가?  나는 명백히 후자라고 본다. 박세리나 박지은, 그 외 다른 골프 선수들이 골프를 친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평소에 상류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특히 즐겨하는 운동이 골프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반감과 골프를 묶어 골프를 치는 것이 나쁘다는 스테레오타입이 나온 것이다. 만약 그들이 즐겨하는 것이 골프가 아니라 크리켓, 승마같은 운동이라면, 그때도 똑같은 비난을 할 것인가? 아마 '승마하는 국회의원'같은 화제성 기사가 나왔으면 나왔지 비난하는 기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비난하는 악플은 나오겠지만...=ㅂ=)

하지만 골프를 치는 것에 대해 아직도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주장은 '공복인 국회의원이 사생활부터 챙기려한다'는 일관적인 판단근거를 가지고 비난을 하는 경우에만 인정할 수 있다. 외유는 명백히 사생활에 해당되며, 국민의 대의자인 국회의원은 일정기간 사생활을 제한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외유의 형태에 관계 없이 비난할 수 있다. (주1) 그리고 그 비난에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논의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물론 이런 분들은 자기 주장의 선명성을 더하기 위해 '골프'라는 말을 일부러라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사생활의 범위'에 대한 논의 말이다.

여기서 자기의 정치적 사고방식에 따라 입장이 갈릴 수 있다. 나는 물론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정 부분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를 국가에 위임할 수 있다고 보는 우파적인 입장이다. (주2) 그리고 '임시국회 회기'가 주말의 사생활을 즐길 권리까지 내놓아야 하는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입장이 갈릴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생활을 제한받을 상황을 어디까지 잡냐에 따라 좌와 우가 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방임주의적인 나로서는 국가 비상사태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권력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이 원칙에 따라 나는 사생활을 제한받아야 하는 상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원칙이 아직까지는 우파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우파를 자처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라 골프를 치던 안 치던 그것은 국회의원의 사생활의 영역이고, 따라서 그 사생활이 국회의원으로서의 능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회의원으로서의 능력만 확실하다면, 그 사람이 뭘 하던 간에 그 행위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다. 매일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일은 다 끝내놓고 자기 계발을 하는 천재형 국회의원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조건 노력하는 모습만 보인다고 다가 아니다. 노력하는 모습은 카메라만 비추면 보여주는 연기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들이 평소에 어떤 여가활동을 하느냐가 아니라 국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이다. 주말에 봉사활동을 열심히 다니는 국회의원이 정작 본회의장에서는 난장판을 벌이는 선봉장이라면, 그 때는 봉사활동에 대해 비난할 것인가? 국회의원의 여가활동에 대해 비난하다가 국회에 있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의 노력을 찬탄하는 그런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주3)


추신1 : 그런 의미에서 한나라당의 비난은 그냥 길가에서 들려오는 BGM으로 생각하고 있다. '골프나 치고 다니다니......'같은 논거를 드는 사람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비합리적인 사람들은 그저 한 켠에 치워놓는 것이 정신건강에 최고다. 

추신2 : 국회의원 회기가 국회의원의 사생활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주장 자체는 존중할 수 있다. 물론 존중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 주장이 내 주장과 대등한 위치에서 논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주장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임시국회 회기에 국회의원의 사생활을 제한하는 것이 어떤 이득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권력의 남용을 불러오지는 않을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논의가 가능해진다.    
 
(주1) : 물론, 표면상 공무에 의한 출장이었음에도 외유성 행위를 했다면 이건 당연히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일부 지자체 의원들의 연수보고서가 비난받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지금 논의가 되는 사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물론 이번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전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이번 사태에 덧씌우려 획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어줍잖은 시도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오로지 '표면상 비슷한 상황이면 전부 똑같은 상황'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뿐이다.  

(주2) : 물론 그 국가의 이념에 따라 권리를 위임할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포기하고 특정 도그마에 휘둘리는 비합리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비토할 것이다. 우파는 무조건 국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을 적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변태적인특이한 생각이므로, 모든 우파가 이런 생각은 가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주3) :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국회의원들의 봉사활동 같은 뉴스에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무능력을 '봉사활동'이라는 이미지로 가리려 하는 시도는 아닌가? 마케팅을 통해 매출을 올리려는 마트나 백화점의 상술에 대해 비난을 하면서도, 이런 시도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다. 봉사활동에 땀흘리던 사람은 본회의장에서 졸면서도 식은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땀샘은 어딜 가도 땀샘이다.

'오픈소스'와 '익명성'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오픈소스'. 지성의 공유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더 나아가 표현의 증거를 남기고 싶은 욕구, 개인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정도로 증대된 생산력, 그리고 개별화된 소비욕구와 공급욕구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통체계. 이렇게 각각 따로 발전해왔던 수요와 공급의 첨단기술이 모여, 수요와 공급이 한데 어우러져 구별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활동이 창출되었다.

기존 공급체계와 유통체계가 다양한 수요를 모두 충족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수요자들은 자기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해왔고, 그 결과 시장참여자들은 기성 유통시스템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분야에서부터 공급체계를 새로 짜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발달은 지식을 유통하는 기존의 시스템에 의존할 필요성을 크게 줄여주었고, 지식의 흐름은 점점 방대해져 곧 산업이 되었다. 방대한 지식은 그 자체로 사람을 불러모았고, 사람들은 지식의 흐름 안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모으고 또 제공하면서 다양한 수요를 스스로 충족했다. 이윽고 이런 흐름은 지식산업을 기존의 산업에서 분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곧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한 없이 풀려 진화를 거듭했다. 이렇게 기존 시스템의 경직성을 타파하기 위해 출발한 오픈소스는, 이제 기존 시스템과의 융합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단계에 이른다. 오픈소스 시스템에 참여하는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 없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의 참여자라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새 시대의 흐름과 적당히 거리를 두려한 기존 시장의 지배자들은 자기 산물이 오픈소스에서 진화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들은 기존 시장에서 새 시장으로의 변화가 자기에게 손해라고 생각하는 절대적 시장지배자들로서, 오픈소스의 겉모습은 빌려오되 그 유통은 오로지 자기들만이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도 이들은 적어도 정직하기라도 하다. 겉으로는 오픈소스를 추구한다 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나중에 오픈소스의 산물을 독점하려 시도하는 자들이 오픈소스 시대의 권력공백을 틈타 활동한다. 이들은 자기가 유리할 때는 오픈소스 정신을 들먹이면서, 그 산물이 이익을 낼 시점에서는 기존 경제 시스템의 룰을 강요하여 이익을 독점하고자 했다. (주) 이는 오픈소스 시대의 활력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매우 질이 나쁜 행위이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아예 오픈소스의 판을 깨서 기존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들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

오픈소스는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양방향성 피드백을 공유하며 이 과정에 스스로 참여하여 집단지성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것을 위해 꼭 필요한 토양이 바로 언론의 자유이다. 개인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그것이 처벌받지 않음을 보장받는 사회 하에서만 소비자는 비로소 생산자가 될 수 있고 집단지성을 쌓아갈 원동력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언론의 자유는 바로 '익명성'과 맞닿아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익명성은 인터넷에서 이름을 까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 익명성이 아니다. '힘을 가진 자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이라는 의미에서의 익명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름없는 군중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시점에서의 그 '이름없음'을 논할 때에 쓰이는 익명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보복받지 않을 최소한의 방패'로서의 익명성에 대한 사유이다. 사회에서 익명성의 문화가 제거되는 순간,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는 더 이상 활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익명성이 없더라도 비판하려는 대상이 자신을 보복하지 않거나, 또는 못할 것이라는 상호신용이 확보되지 않는 한, 익명성은 언론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소시민들이 자기의 힘을 발산할 수단이 없던 폐쇄사회의 시대에는,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자는 힘을 가진 자의 눈에 너무 쉽게 띄였다. 때문에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다른 유력자나 집단의 비호를 받음으로써 핍박하려는 자와 대등한 권력을 개인적으로 얻거나 빌리지 못하는 이상, 권력자와는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모험이었다. 이후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비로소 '익명성'이 생겨났고, 익명성을 방패로 내건 반대자들의 힘이 권력자들이 일일이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졌을 때, 권력자들은 민중의 힘을 인정하고 민중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그리고 정치분야와는 달리 절대주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경제 분야 또한, 이제 민중의 개인적 욕구가 '오픈소스'라는 형태로 경제 민주주의를 구현해가고 있다.

그런 현 시점에서 1인 미디어마저도 규제하려는 언론통제를 시도하는 것은, 수많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익명성'을 통해 형성한 느슨한 연대를 파괴하여 각개격파하고자 획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익명성의 폐해가 심각하므로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리 있는 이야기지만, 아예 익명성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은 표현의 자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원칙을 흔들려 하지 말라.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익명성, 시위현장에서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익명성, 폐쇄된 기표소에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익명성,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더 타기 위해 이익단체를 조직할 수 있는 그 익명성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익명성은 네티즌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기로 결정한 시민들 모두가 이미 향유하고 있고, 그래서 지켜져야 할 권리인 것이다.    


: 대중이 문화를 이끌어가는 시대에서는, '널리 알려지는 것' 그 자체도 또한 이익이다. 노래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일본의 니코니코 동화(일본의 유튜브 쯤 되는 사이트)에서 일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패러디하며 히트한 어떤 노래가 일본 저작권관리단체인 JASRAC이 개입된 이후에는 노래를 작곡한 개인 작곡가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미 널리 알려진 노래를 장사에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이 독점하는 순간, 이 노래를 통해 이뤄졌던 오픈소스의 축제는 끝난 것이다.  


내가 대체의학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반의학 운동가들의 말을 들을때마다 꼭 성대 언저리에서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말이 있다.

'좋다. 당신들의 말 다 인정하겠다. 그러니 한 번 마음대로 해봐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라'

하지만, 별 문제 안 될 것 같은 이 말은, 사실 의사라면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다. 

왜일까? 1차 의료를 담당한 의사는 적절한 시점에 환자를 전원하지 않았을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실제로 큰 병원으로 옮기는 환자들 중 상당수는 '환자를 붙잡아두고 질질 끈 그 의사 찾아가 뒤집어놓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를 억울하다고는 생각할지언정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의사는 없는데, 그것은 자기 능력 밖의 환자에 대해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의사는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해를 끼친 것이기 때문이다. (주1) 반면에 암이나 다른 중병인지 모르고 복통이나 피로감, 통증같은 증상만을 해결할 요량으로 병원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때늦게 병원에 와서 병을 진단받고, 제 때 치료받을 시점을 놓치게 한 원인에 대해 책망하는 장면을 보기는 힘들다. 

만약 의사가 지고 있는 이러한 책임을 역시 지겠다면, 개인적으로는 의학 이외의 다른 술기가 환자를 다루는 것을 용인할 의향이 있다.(물론, 이 경우에도 다른 술기의 이론적 정합성을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널리 쓰이는 것과, 옳은 것은 분명 다르다.)  이미 이런 식으로 의료정책을 운영하는 나라도 있고, 대체의학자가 환자의 치료를 지연시킨 것을 인정하여 처벌을 받는 사례도 종종 나오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이런 운용이 가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윤리보다는 오늘 저녁을 더 걱정하는 내 특이한 막장성향 때문이고, 절대 다수의 의사들은 이를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장담할 수 있다. 반의학 운동가들이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피해는 남는다. 그리고 그 피해는 사실 얼마든지 예방 가능한 피해이다. 'do not harm'. 환자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의사의 대원칙은, 바로 눈 앞에 마주 앉은 환자를 두고 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모든 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2) 그리고 바로 이 대원칙을, 의사는 반의학 운동가들의 말을 용인해준 까닭에 저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의사는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책임을 져라' 라는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결국 반의학 운동가들의 말을 의사들이 믿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일단 먼저 믿음을 줘봐라" 는 말이 꼭 나온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쪽이 그 당위성을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의 주장을 믿지 못하는 의사들을 책망하는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없다. 믿음을 얻고 싶은가? 의사의 감시를 피해 자기가 생각하는 술기를 마음껏 펼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실증하라. 실증을 통해 당위성을 증명하라. 의사가 반의학 운동가들의 주장을 듣지 않는 것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주장을 용인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원칙의 붕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실증을 통해 이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는 한, 또는 자기가 신봉하는 술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움을 키우는 한, 적어도 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말을 계속 할 것이다.

주1 :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 의사는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도록 훈련되어있기 때문에, 상급병원으로 전원해야 할 정황이나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전원을 하지 않은 점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물론 환자입장에서는 재빨리 전원했으면 좋겠지만, 적절한 전원 시점을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은 1차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로서는 인간 이상의 일을 하라는 무리한 요구이다. 눈으로 척 한 번 보고 병을 알아내라는 식의 주장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단지, 세밀하게 잘 살펴봤으면 놓치지 않았을 정황이나 증거를 놓쳐서 전원의 시점을 늦춘 것이라면, 이것은 의사의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을 하지 않은 것이므로 문제를 삼을 수 있고, 실제로 삼고 있다. 의학은 절대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결과'가 아닌 '(현 시점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가 중시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더 나은 방법론이 나오기 전에는) 절대적인 것임을 명심하면 의료행위에 있어 많은 오해가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주2 :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에서, 생명에 위협이 되는 물리적인 해를 끼치지 말라는 식으로 협의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치료의 지연을 통해 예후에 영향을 끼치는 간접적 위해 뿐만 아니라 경제적 위해까지 포함되는 개념이다. 가격대비 효용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증명이 없음에도, 환자로 하여금 의학적 필요성을 무시하고 자기의 행위를 구매하게 하고 심지어 원래 필요했던 의료행위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등의 행위 또한 의사는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판단한다. 이런 판단의 겉모습과 의사에 대한 편견을 버무려 '밥그릇 지키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한다면 더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사람은 효과가 실증되지 않은 의료행위에 비싼 돈을 쓰겠다는 수요층이므로, 의사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불필요하게 들릴 것이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이 다가 아니라는 점은 알아주셨으면 한다.    


하늘을 꿰뚫는 창이 될 수 있는데 왜 총을 쓰려 하는가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이 글은 제 이전 글에핑백(링크)을 달아주신 분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사실 이전 포스팅과 댓글에서 주구장창 이야기했던 것의 변주일 뿐이니, 안 읽으실 분은 그냥 넘기셔도 좋습니다.

일단, '편의상 구분'을 위해 '양방'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편의상'이라는 이유가 '양방'이라는 말을 합리화시켜주지는 못하거든요. 그냥 혼자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또한 특정 집단 내에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제 글에 핑백을 보내신 이상 서로간에 합의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쓰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거든요. '양방'이나 '의학'이나 음가도 같고, 심지어 타자치기에는 '의학'이 더 빠릅니다. '편의상 구분'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의학'이라고 써야 되는 것 아닐까요? 반쯤은 농담으로 썼습니다만, '양방'이라는 단어는 분명 특정 집단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단어로서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정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못 찾는다면, 상호간에 자기를 대표하는 단어를 써주는 것이 무난하지요. 한쪽은 '의학', 다른 쪽은 '한방' 내지 '한의학'으로 말이죠. (느낌상 '한의학'이 더 상위로 보이긴 하는데, 사실 이 두 단어 사이의 위상 차이를 못 찾겠더군요. 모든 한의사분들이 두 단어를 혼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그 용법을 존중하여 혼용합니다.) 둘 다 서로가 서로를 지칭하는 단어로서 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소통이 끊기기 때문에, 단어 선택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게다가 가치판단이 개입된 단어를 아무 생각없이 입에 주워담다간, 그 가치판단을 개입시킨 쪽의 견해를 수용한다는 느낌까지 들지요. 그런 단어를 상대방에게 쓰도록 강요하는 것은 논쟁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단어 선택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귀찮지만, 소통의 시작을 위해서는 꼭 해야하는 일이지요. 

일단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죠. 위궤양이 일어나는 것을 각종 조직학, 생리학, 병리학적 국제용어를 쓰면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냥 '위벽을 보호하는 방어인자가 약해지고 공격인자가 강해지니까 그렇다'고 설명하면 끝입니다. 실제로 환자가 오면 그림을 그려서 저렇게 설명해드려요. 그 정도면 충분히 위궤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고, 원인을 왜 교정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십니다. 환자에게 설명하는데 그리 어려운 의학용어는 필요 없어요. 그냥 풀어서 설명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한방 쪽에서는 한방의 내용을 그렇게 설명하지 못하고 의학을 빌려서 설명하려는 거지요? 그건 한방이 한방 단독으로는 환자를 설득할 수 없는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요? 환자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가 빠져 있기 때문에 환자를 설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요? 이건 다른 사람이 언급하기 전에 그 학문을 하는 사람이 먼저 생각해야 할 회의적 사고입니다. 자기 학문에 대한 비판적 사고로부터 발전의 싹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한 학문이 어떤 개념(의학의 예를 들면 질병)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시점이 바로 학문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대 한의학에서 한의학적 개념만으로 특정한 병을 설명하지 못할 때, 그 병은 한의학에 있어서 '한계점'이 되는 것이겠지요. 의학 또한 그런 한계점이 분명 있습니다. AIDS는 수많은 의학자들을 무릎꿇렸고, 그래서 혹자는 의학과는 전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빌려와 '신의 벌'이라는 편의적인 설명으로 무마하기도 하죠. 그래도 의학은 의학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한계를 깨고자 노력합니다. 이건 의학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모든 학문이 필연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지요. 발전하지 못하는 학문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다른 학문에 흡수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지요.
그런데 한방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한의학 자체의 발전을 통해 지금까지 한의학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질병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냥 의학을 가져다가 쓰고 있나요. 한의학이 의학을 빌려오지 않고서는 병의 해결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면, 그 한계를 인정하고 의학에 정식으로 힘을 빌려달라 청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한의학이 충분히 모든 병을 설명 가능한데 오로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의학을 빌려오고 있는 것이라면? 한의학자도 의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성을 갖추었으니 이미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 '의학적인 설명'이 한의학에서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는 따로 검증해야 할 문제입니다만.) 왜 '우리들도 동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의사자격증을 다오'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군요. 

혹여 현대의학의 진단기기가 한의학적인 개념을 실증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을 한의학적인 개념에 맞게 개량하여 사용하는 것은 학문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히 가능합니다.(역시나 한의학적인 개념이 맞는지 아닌지는 따로 이야기할 문제입니다.) 전류의 흐름을 측정하는 물리학적 장비는 지금 근전도계나 뇌파측정기로 업그레이드 되어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드신 부정맥을 가지고 말하자면, 부정맥을 일으키는 심장의 이상전기신호를 한방에서 그 나름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심전도 측정기계의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독자적인 진단기기를 만든다면, 그럼 훌륭한 한방진단기기가 탄생하겠지요.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부정맥에 대한 설명이 맞는지 아닌지는, 여러 번 언급했듯이 물론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노력 없이, 엄연히 의학적인 개념으로 설계된 심전도를 그냥 가져다 쓴다? 심전도 측정결과에서 의학적으로 미처 몰랐던 한방적 개념이 검출되고 있던 것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닌 한 심전도는 한의학적인 목적이 아닌 엄연히 의학적인 목적으로 가져다 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단 심전도 기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만약 심전도를 찍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그 필요성은 의학적으로 사유하고 의학적으로 추론한, 엄연한 의학에 의한 필요성이죠. 다른게 아니라 이게 바로 '의학으로 말하고 의학으로 사고하는 태도'입니다. '의학으로 말하고 한의학으로 사고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지요. 정 환자가 그런 병이 있을까봐 불안하다면, 다시 말해 의학적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생각되면, 바로 옆에 있는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끝날 일입니다. 

물론 '조선사람은 총 쓰면 안되냐?'라는 말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사 면허는 '우리는 한의학을 이용해서 환자를 보겠다'는 선언, 즉 '우리는 창만 쓰겠다'라는 선언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되죠. 혹시 의학 커리큘럼이 한의학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학과에서 커리큘럼을 끼워넣는다고 바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죠.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참고자료'이상은 되지 못합니다. '참고자료'로써 하이브리드를 위한 연구에 사용한다면 모를까,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아 아직은 남의 학문체계로 남아있는 것을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그대로 쓰고 있는 현실을 '참고자료'가 변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쓰는 것은 '참고자료'의 올바른 사용법이 아닙니다. '참고자료인 의학에 따르면, 이 환자는 한의학적 필요성보다 의학적 필요성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러므로 의사에게 보내는게 맞겠지' 라는 판단이 바로 참고자료를 올바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혹시 이게 불리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의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듯이, 님도 6년을 바쳐 공부한 한의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봅니다. 자기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 틀리지 않고, 인체의 현상을 다른 학문의 도움 없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면 절대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실제로 창을 쓰는 법이나 창 자체의 개량이 가능하다면 절대 불리한 것이 아닙니다. 비단 한의학에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걸어왔던 길이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지요. 
창은 타제석기로 촉을 만든 창에서부터, 마케도니아의 사리사 창, 란츠크네히트의 파이크 등으로 많은 발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반면에 총은 개발 초기에는 화살에게도 밀릴 정도로 형편없는 무기였지요. 하지만 결국 총은 나름의 발전을 거쳐 비교우위를 획득했습니다. 심지어 바요넷을 만들어 창의 존재의의를 잃게 만들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창의 존재가치가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현대전에도 백병전은 있고, 마침 총이 없다면 창은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무기입니다. 혹시 압니까? 잘 연구하면 나중에는 화약을 달아 신기전으로 만든다던가, 아니면 아예 창의 새로운 사용법을 연구하여 기동포격소녀 나노하(주)같이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창의 발전을 위해 총의 구성요소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창을 만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총을 가져다 '창'이라고 이름만 바꿔서 쓰겠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창의 한계를 인정하고 같이 총을 사용하자고 하면야 논의할 여지는 있지만(이게 바로 의료일원화지요), 그렇지 않고 '원래 우리도 총을 쓸 수 있게 되어있어'라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게다가 현실을 살펴보면 총을 가져다 쓰면서 '창이 최고다'라고 외치고 '창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니, 공감을 이끌어낼 리 만무하지요. 이런 말을 듣기 싫으시다면, 현실에 대한 교통정리를 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일 겁니다.


: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할일없는 분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 소위 '마법소녀'물로 시작한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는 마법소녀의 공식을 깨뜨린 괴작으로 평가됩니다. 마법봉을 휘두르며 기상천외한 마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벗어나, 마법봉으로 무려 포격을 때립니다.(......) 마법봉의 새로운 사용법을 정립했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을리 있나.(쩝) 비슷한 예로, 분명 복장은 마법소녀같은데 실제로는 맨주먹으로 정의를 노래하는 '프리큐어' 시리즈도 있습니다.(=_=) 혹시나 여자아이를 자녀로 두신 부모님이 계시다면, 상기의 두 애니메이션은 시청을 자제시키도록 지도하는 쪽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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