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07일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정치'
최근 종합병원2라는 M본부 드라마에서 담도염과 췌장암 재발이 병발한 환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평소 드라마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무미건조한 생활이지만, 이 에피소드가 방영된 날은 우연히 근무하는 관사에서 본가로 몸을 옮겼을 때라 가족들과 진득하게 TV앞에 앉아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두가지 병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식으로 내용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제로는 두 질환 모두를 염두에 두고 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드라마에서는 수술을 감행하는데, 사실은 하면 안된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이글루에서 종합병원2에 대한 의학적 고찰을 하고 계신 Hwan님께서 더 자세히 설명하셨으므로 꼬꼬마 새끼의사의 잡설은 여기까지.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것을 '의학적 견지에 비추어볼때 이는 선택할 옵션이 아니다.'라고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이 바로 의사의 역할이다. 사실에 대해 키우지도 말고, 줄이지도 않으며, 오로지 실증된 진실을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 의견의 기초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가치판단을 하지 말고, 기초내용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치판단을 거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전문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의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면 자기 분야에서 누구나 하고 있고, 또 해야 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특히, 이 덕목은 사회를 조율하는 정치가가 가져야 할 태도이다. 국민의 욕망은 실로 다양하며, 이를 구현화하고자 하는 동기도, 수단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욕망은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떤 기준으로 조율해야하나? 조율의 전문가인 정치가는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럼 그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자. 조율의 기준은 물론 정치가의 포지션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어느 포지션에 서있던지 간에, 꼭 지켜야 할 원칙은 서로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중재의 필요성은 분쟁의 어느 단계에서 발생하는가? 중재라는 이름으로 정치의 권한이 남용되지는 않는가? 적절한 중재의 개입시기는 어느 때인가? 중재할 때의 기준은 어느 정도에 세워야 할 것인가? 기준은 어떤 근거로 정당화시켜야 하는가? 이것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의문이 나오겠지만 내 깜냥으로는 일단 이 정도다.
이 중에서 내가 특히 관심이 있는 부분은 바로 중재의 시기와 기준의 근거이다. 사회 구성원간 다툼이 벌어졌을 때, 정치는 개입한다. (개입 수단은 립서비스에서 공권력까지 다양하겠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그런데, 다툼이 있으면 무조건 정치가 중재에 나서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토론의 장만 마련하는 웨이터 정도의 역할만 할 것인가? 돈 계산이 틀렸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논쟁은 그냥 놔두면 된다. 하지만 싸우는 집단이 자위대와 특기대, 섹트 테러조직이라면? (오시이 마모루 作 '인랑'에서 따왔습니다. =ㅂ=) 다툼의 피해는 논쟁에 나서는 단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지게 된다. 따라서 논쟁을 방임할 경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면 그 때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중재의 시기는 이 쯤 해두고, 개입했을 경우 중재의 근거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자. 분쟁은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그 모든 것을 다 통제할 능력은 없다.(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집단은 하나같이 역사적으로 도태되는 종말을 맞았거나, 맞는 중이다.) 따라서 국가가 중재를 시도할 때의 문법은, 분쟁 당사자들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법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 중재자가 가져야 할 문법은 어떤것이어야 하는가? 먼저 분쟁 당사자 양 쪽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논쟁의 대전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에 벗어나는 주장은 모두 폐기하도록 강제해야한다. 이런 대전제를 '원칙'이라 바꿔 말해도 상관없다. 생각보다 많은 논거가 이 기준에서 탈락한다. 예를 들어, 올해 보험재정 흑자분을 의학적인 필요성이 적은 분야 (이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는 상관없다.)에 먼저 제공해서 의학적 필요성이 큰 분야가 반발했다고 하자. 이 때 반발한 측의 주장에 대해서 반론이랍시고 흑자분을 제공받은 쪽이 '우리가 받는 것에 신경쓰기 전에 기아에 허덕이는 후진국에 지원하지 않는 세태부터 고발하는 것이 어때요?'라고 말했다면, 이는 명백히 논쟁의 대전제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부족한 한국 보험재정은 보험의 취지에 맞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자기 딴에는 비슷한 논리라고 들었지만, 이런 논법은 논쟁에 일부러 다른 화두를 섞어 논쟁을 단절시키는 매우 나쁜 토론 태도이다.
그 다음에 각 논쟁 당사자의 주장과 그 논거를 듣는다. 주장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은 일단 유보해야한다. 이 시점에서는 오로지 논거의 정합성만을 분석해야 한다. 이게 쉬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논거의 사실관계가 명백히 틀린 경우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가 끝날테지만, 논거라고 든 것이 실은 논거가 아니라 자기들이 주장하는 내용에서 자가발전한 것일 수도 있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시도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인정하기 어려운 일부 집단의 상식을 논거로 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그 논거의 근거에 대한 분석이 필요해진다. 이 분석이 잘못되면, 상대방으로부터 '국가 권력이 한 쪽을 편든다!!'는 질시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중재는 실패하고, 정치는 그저 특정 이익단체의 대변자 노릇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럼, 그 분석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분석의 바탕부터가 공정하지 못하면 분석의 결과도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논쟁 당사자 모두에게 공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과학적 방법론'이 등장한다. 인류가 생각해낸 여러 수단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공정성을 제공해준 도구이다. 과학적 방법론이란 그저 실험실에서 시약을 넣고 DNA를 검출할 때나 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내가 10시에 나가면 내 걸음으로는 11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거야.' 같이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판단마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추론이다. 이를 이용하여 논거의 정합성을 분석해야만 공정성이 확보된다. 첨언하자면, 이 분석은 '이 쪽의 주장이 맞다'라는 증명이 아니라 '이 쪽의 주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도권의 중재 하에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증명을 위한 과정이다. 이를 혼동하고 근거가 맞다고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 것 마저 충족시키지 못하는 주장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발견도 아니다. 우리는 매일 TV에서 한 번 씩은 한 쪽의 일방적인 억지 주장을 듣고 있지 않은가.)
논쟁 당사자간 합의할 수 있는 대전제를 세우고, 양 측의 주장이 실증된 논거를 바탕으로 주장되고 있다면, 이제 양 측의 주장은 동일한 위상을 획득한다. 이제 여기서 정치의 개입이 중요해진다. 두 주장이 모두 제3자가 보기에 실증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정치가는 자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결정은 물론 선택받지 못한 한 쪽의 반발을 부르게 되겠지만, 이를 감수할 능력이 없다면 애초에 정치가가 되겠다고 나설 자격도 없다. 게다가 제3자가 보기에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들어 결정했다면, 이 판단의 정당성을 근거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는 상당 부분 이렇지 못하기 때문에 '편파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어떤 사안이든 숙고하지 않고 성급히 개입하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망친다. 한 쪽의 주장이 동일한 위상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양 측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원칙만을 일깨워줘도 자연스럽게 일이 풀릴 수 있다. 하지만 논쟁의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거나, 원칙을 무시하고 다수가 원하는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채택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치력의 남용을 부른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관례가 과도한 정치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공권력의 비대화를 유발한다. 이는 정치가가 표를 쫒아 원칙을 저버린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게다가 도덕적 해이에 빠진 정치가의 행위를 오로지 자기 집단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용인한다면 그 집단 또한 공범이 된다. 정치가들에게 '포퓰리즘'의 맛을 알게 해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횡행하는 나라라면, 원칙을 무시하고 논쟁을 결정지은 다음에 그 결정을 (나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술수로 기정사실화할 수 있다. 이런 정치를 용인해주는 나라에서는, 정치가는 언제나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지만 절대로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원칙을 정하는 것. 그리고 현상을 공정하게 볼 수 있는 판단력. 그것이 정치가가 사상보다도 먼저 가져야 할 덕목이다. 그리고 그 원칙을 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열린 마음으로 구하고, 그들의 의견을 토대로 사안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사안을 평가하되, 그 평가 근거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공정성을 획득해야 한다. 여기에 '그 주장은 이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고려되어서는 안되는 옵션입니다'라는 판정을 할 수 있는 심지까지 있으면 더욱 좋다.(주) 그렇게 만들어진 원칙이 쌓이고 쌓여 그 나라의 시대정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정신이 세계의 common sense와 합치한다면, 그 나라는 세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주 : 구태여 다시 말하지만, 모든 전문가는 매일 그 일을 하고 있다.
추신 : 저는 정치학이나 사회학같은 것과는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소시민으로서 정치인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감상일 뿐입니다. 보시면 어떤 새로운 내용도 없는 당연한 말의 나열입니다. 제목부터 '당연한 정치' 아닙니까. -ㅂ-
# by | 2008/12/07 19:51 |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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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새로울건 없고, 2000년도 더 전부터 '민주주의는 위험하다'고 외친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에 대한 반박, 논쟁은 지리하게 지금까지 이뤄져 왔으니 그 무덤에 또 한줌의 모래를 뿌리기란 시간낭비겠지요. 요새 랑시에르가 번역되어 나왔다는데, 그게 영 엉망이라 말이 많은거 같군요.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본다면 要를 이해못할 수준은 아니라고 하니 한번 읽어보세요.(어디까지나 '권유'랍니다)
꼭 이런얘기를 하면 문혁이나, 스딸린의 대숙청 얘기를 꺼내는 분들도 있던데 설마...?
다른 것은 다 제껴두고 귀하는 오직 근거를 세우는 rule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셨으니, 저도 그 쪽에 좀 더 심화해서 이야기를 풀어보죠.
'전문가주의'라......참 좋은 말입니다. '주의'만 붙이면 참 느낌이 알싸해진다니까요. 이렇게 태그를 붙이니 제가 엘리트주의자가 된 느낌이군요.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저는 '전문가가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요? 어디까지나 자문입니다 자문. 전문가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지요. 그 다음은 전문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시빌리언 컨트롤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문가가 실증된 사실에 입각한 기준을 세웠음에도 그것을 지키지 않겠다면,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실행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실행자가 굳이 지지 않았어도 될 책임을 손수 지는 것을 보고 한 잔 술에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가 딱 전문가의 위치이지요.
그리고 귀하는 '기준'의 의미를 오해하는 듯 한데, 뭐, 이건 제가 오해의 소지를 제공했으니 이해하겠습니다. 조금 글을 더 잘 쓸 걸 그랬군요. 귀하는 rule을 세우려는 의도가 불순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전문가가 중립자가 아닌 이해 당사자일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우는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귀하와의 논쟁이었던 '공보험 체제 편입의 우선순위' 문제에서 rule이란 의사만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조산사 할 것 없이 모든 의료관련 직능이 참여해야지요. 이 모든 직능이 토론을 거쳐 여론에 흔들리지 않을 great rule(맞는 표현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음;;;)을 정하고 그에 따라 우선순위를 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수가협상에서는 이런 process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지요. 오직 포퓰리즘과 정치적 이해만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그리고 이건 사실 공보험의 태동기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전통'입니다만.) 보험재정을 지원해줄 능력이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공단또한 이런 현상에 불을 지르고 있지요. 즉 시빌리언 컨트롤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만성적인 상황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는 위대합니다. 누가 위험하다는 말을 합니까. 저는 세상은 언젠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전문가들과, 그 의견을 합리주의와 회의주의에 의해 세상에 적용한 시민(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이즘을 주창했고, 그것이 시민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 시대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자문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는 뭐 아시는 대로입니다.(귀하가 말한 스탈린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군요.) 또한 전문가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의 후원 아래에서 자라는 것이니 어느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관계입니다. '전문가'란 사실 시민들이 다 만들어놓은 현상을 그저 잡아내어 체계화할 뿐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도 현상을 인간의 한계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인식의 범위 안에 가두고 말죠.) 이 정도면 제가 '민주주의는 위험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분들께 이해되셨을까 모르겠군요. (넵. 길게 졸필을 긁는 이유는 귀하를 설득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뭐, 귀하가 권하신 책은 읽어보도록 하죠. 어차피 곧 있음 월급날이니.
보다 멀리보고 신중하게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우리나라 정치환경에 과연 가능한 것인지 ... 아마도 정치가들 중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 자체는 많을 것입니다. 다만 주변환경이 그런 정치가들이 클 수 없는 생태계(ecosystem)으로 되어있으니 자꾸 고사할 뿐 ...
윗분 아래 글에도 그렇습니다만 글의 전반적인 논지와 다른 댓글이 자꾸 달리네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라'는 말이 유행인데, 적어도 정치권과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 싶습니다. 실적만 너무 강조한 공무원 개혁 방향이 문제였을까요, 아님 원래 그런 정치적 태도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문적 토양이 있어서일까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군요. 원칙을 정하는 듯 싶더니 어느새 바꿔버리고, 그 다음 정권은 또 자기 입맛에 맞춰 진실의 비중을 키우고 줄여 또 원칙을 비틀어버리고......이것이 쌓이고 쌓여 넵. 막장이지요. 아마 의료문제 뿐만 아니라 교육문제나 다른 분야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걸 보고 식자들은 '철학의 부재'라고 한다지요? (......)
* 저 한의본 뭔지 하는 분은, 아직도 본문의 논지를 오독하시는 것 같군요. 자꾸 은근히 의사와 한의사 간의 알력이나 대립인 양 몰고 가려는 게 영...;;;
저는 인터넷이 좋습니다.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프라인 논쟁에서는 할 수 없는 긴 호흡의 사고가 가능하거든요. 덕분에 좀 더 충실한 논쟁이 가능한 듯 싶습니다. 익명성 때문에 싸움으로 번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논쟁의 rule을 확고하게 세움으로써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한의본4님의 경우도, 첫 단추를 잘 못 꿰었다 하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긴 호흡의 논쟁에 어울려주신 것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긴 호흡이 가능하다고 해도 제가 옳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현재 논쟁 테이블, 그것도 엄청나게 자그마한 이 테이블에서 완전한 논박을 받지 않은 주장'으로써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생각할 뿐이지, 더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주장이 나오면 기꺼이 테이블에서 주장을 내릴 겁니다. 이것은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당연한 수순이지요. 잘 못 주장한 것에 대해 사과할 필요도 없고, 주장을 잘 한 것에 기고만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과할 것이 있다면, 오로지 논쟁 과정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들 뿐이겠지요. 사과의 요구는 어디까지나 이것에 한해 가능할겁니다.
이런, 사족이 좀 길었군요. 파롱의 말이 지당합니다. 화두를 붙잡지 않는 세태도 문제죠. 하지만 그것을 꼭 시민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보입니다. 사고할 시간 자체를 내기 힘드니까요. 초중고 중등교육은 진학을 위해, 대학교는 취업을 위해 시간을 다 쓰는데 사회에 대한 회의주의를 기를 시간이 어디있겠습니까? 회의주의는 한국식 시스템 하에서는 진학과 취업에 1g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것에 대해 책망하고 싶지는 않군요. 뭐, 물론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