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학문의 발전이라 말하는가?

학문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자기 학문 내에서 더 좋은 해석방법을 찾아내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 있다면, 그 학문은 발전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발전은 자기 학문이 지금까지 노정해온 성과가 재해석되거나,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더 고차원적인 성과를 이끌어 냄으로써 가능하다.


또한, 일견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학문체계라도 유사성이 발견되거나 서로가 놓치고 있던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이를 교환하고 융합함으로써 첨단에 이를 수 있다. 이런 하이브리드는 어떤 분야에서도 이뤄지고 있고, 또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외부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자기 학문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면, 이를 학문의 발전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한 설명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과 연구 성과를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은 다를 수 있으므로, 빌려온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런 융합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경제가 개입되고, 기득권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득권은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을 뒤덮은 그 '기득권™'이 아니다.)

그리고 경제적 문제 뿐만 아니라, 빌려온 학문이 고도로 발달되었거나 타인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분야여서 해석에 극도의 전문성을 요할 수 있기 때문에, 두 학문간의 융합이 끝나지 않은 개념을 섣불리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외없이, 섣부르게 사용하려는 쪽이 이런 저항을 두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행태다'며 부당한 비난을 한다.)


따라서 이런 저항을 피하려면, 빌려온 개념이 자기 학문체계와 맞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빌려온 개념의 일부분, 이를테면 컨셉이나 개념 설계 과정에서의 로직, 개념의 현세적 결과물 등을 차용해서 자기 학문체계에 사용, 새로운 개념을 파생하여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 한다면 더 이상 저항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의사가 어떤 나라의 주술에서 사용되는 민간치료법에서 힌트를 얻어 그것을 의학적으로 갈고 다듬어 새로운 의학적 치료법을 만들었다. 이 치료법을 두고 주술사가 '자기걸 베꼈다!!'고 주장하면, 그건 맞는 주장인가? 한 분야에서 배타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는 한, 그 개념은 어떤 분야에서건 가져다가 쓸 수 있다. (가져간 개념을 가져간 쪽이 효과적으로 연구하는지, 아니면 폐기하는지는 물론 다른 문제다.) 의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물리학이나 신경심리학, 화학같은 다른 학문에서 가져다 쓰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실, 의학이 다른 학문에서 많은 것을 빚졌다 할 것이다. 의학은 좀 크게 말해 다른 학문의 개념을 가져다가 인체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하여 자기화한 학문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다른 학문이 이룩한 학문적 성과를 그저 가져다 쓰려 하면서 '원래 우리들도 쓸 수 있는 것이다'고 뻔뻔하게 주장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자기 학문의 '발전'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사실 발전이 아니라 퇴보다. 자기 학문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다른 학문의 우위성을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 학문에서 성과를 낼 생각은 하지 않고, 현상을 더 잘 설명하는 다른 개념을 그저 갖다 쓰겠다는 태도는, 자기 학문이 부족함이 있음을 자인하는 자기고백이다. 그런 주제에 그 개념을 사용해서 자기 학문의 존재를 연명하려는 시도는, 학자라면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태도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도용한 개념을 사용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며 또한 제대로 맞지도 않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합리화하려 하니, 통탄할 수밖에 없다. 


요약 : 대체 왜, 한방에서 심전도를 하려는 것인가? '심전도'를 '심기도'라고 이름을 바꾸면, 심장의 전기흐름을 비추던 심전도가 갑자기 기나 담을 검출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심전도의 원리를 한방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실증하며, 심전도의 측정 결과를 의학이 아닌 한방적으로 해석하고 또 실증하지 않는 한, 심전도를 한방에서 가져다 쓸 수 있는 당위성을 확보했다 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의학은 심전도에 대해 그 원리를 의학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실증하고 실증된 원리에 따라 실제로 측정하며, 측정 결과를 의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당위성 증명에 대한 요구는 절대 편파적인 요구가 아니다. 학문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다. 문제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을, 학문이 아니라 정치적 우회로를 통해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추신 : 단순히 의료기기 도용만이 도용이 아니다. 정치적이나 법적 해석으로는 그러한 물리적인 도용만을 도용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 한의학이 아닌 의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진료하는 것 또한 도용이다. 의학 교과서를 그대로 베낀 한방지침서나, 매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LCD 화면에서 한의학이 아닌 의학지식'만'을 읊는 한의사들을 보며 더욱 확고해지는 생각이다. 한방이 한방 스스로의 논리로 대중을 설득하지 못하고, 의학을 빌려다가 자기도 의학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인양 마케팅에 이용해먹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다루는 학문에 자신이 없다는 선언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의학은 충분히 의학의 내용을 쉬운 말로 정제하여 환자들에게 의학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왜 한방은 그것을 못하고, 그저 의학을 가져다 쓰는 것인지, 대체 이해할 수 없다.

by 아이페오스 | 2008/12/25 21:48 |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 트랙백 | 덧글(11)

트랙백 주소 : http://dicrence.egloos.com/tb/477637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늑대별 at 2008/12/25 23:40
많이많이 공감합니다. 하고 싶은 말인데 요점정리를 참 잘 해 주세요..^^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6 00:36
저녁 먹은 속이 얹혀서 고생하던 차에 저 뉴스를 봐버려서 말입니다. 식후 소화 운동삼아 달려봤습니다. 아, 사실 싸우는 건 의협에 미뤄놓고(?) 신경 안 쓰고 사는 것이 오래 사는 비결인데......쿨럭쿨럭.
Commented by Polycle at 2008/12/26 01:19
제가 피부로 느끼죠. 저희 한방 양방 치대 삼종셋트 같이 있으면 응급실 일주일만 있어도 의사도 아닌 학생조차 열불이 납니다.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6 01:32
자. '양방'이란 단어를 쓰신 순간 제 회의적 레이더가 작동합니다.(ㅋㅋㅋㅋㅋㅋ) 어떤 집단이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고 우리도 그 단어를 같이 써줄 의리는 없지요. =ㅂ= 저는 무신론자인데, 어떤 종파에서 무신론자를 '마귀의 자식들'이라 부른다고 제가 저를 '마귀의 자식'이라 칭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잡설이 좀 길었는데, 동료 선생님중에 경희대를 나오신 선생님이 계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대충 비슷한 느낌일 듯 하군요. =_=a 뭐, 무턱대고 나서지만 않는다면 저는 별 신경을 안 쓰겠습니다만, 현실은 시궁창이죠. 특정 집단이 믿고 있고 그것을 그 집단끼리만 쓴다면 뭐라 안 하겠는데, (침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도 있다고들 생각하니까요.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일단 제쳐두고 말이죠.) 확실히 현상을 더 잘 설명하는 개념이 이미 정립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치 않고 섣불리 자기식으로 적용하려 한다면,(심지어는 그것이 엄청난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 때는 아마 화를 많이 낼 것 같습니다. 제가 한의대와 의대가 같이 개설된 곳을 나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지도 모르겠군요. (......)
Commented by Polycle at 2008/12/26 01:34
그렇군요. 저도 스스로 부정하고 있던 단어를 저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었네요. 하도 학교에선 그렇게 다들 불러대니.... 여튼 다른건 다 참아도 저녁에 응급실 근무하고 있을때 한방병원(이게 공식 명칭인데..뭐라 불러야 할지)에서 뇌졸중 환자들 실려오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더라구요. 다 좋은데, 제발 똥오줌 구분이나 했으면 싶어요. 환자 목숨이 달린일인데 말이예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8/12/26 01:35
실려온다는 의미는 한방병원 입원해 있다가 다 죽어서 응급실 실려와서 결국은....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6 01:39
좀 돌려서 말했는데, '뇌졸중'이라는 case를 정확히 집어주셨군요. 역시 critical한 질병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는 민감해지는 것이 의사의 본능(?)이지 싶습니다. (=_=)a
Commented by 바드슈 at 2008/12/26 06:24
안녕하세요, 아이페오스님 글 구독하는 한의대생입니다.
저 같은 쪽의 방문은 별로 안 달가워하실 것 같아 죄송하지만; 요즘 생각하던 문제와 많이 통하는 포스팅이라서요. 링크 신고 드립니다.

아이페오스님 글 읽고 오래 고민하게 된 문제가 많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6 09:45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특정 집단에 대해 비판의 글을 쓰긴 쓰지만, 딱히 편견이 있다던가 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쓴 졸필을 보고 계시다니 부끄러울 따름인데요. 저는 '오는 싸움 안 막고 가는 싸움 안 말리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먼저 비매너로 나오지 않는 이상 절대 인격을 건드리는 용어를 쓰지는 않고, 오로지 현상에 대한 비판만을 할 뿐입니다.(때때로 비판을 인격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어 난감하긴 합니다만...)
따라서 어떤 사람이 쓴 글을 읽기 전에는 어떤 재단도 미리 하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단지, 비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말바꾸기같은 비논리를 들이대고 실증되지 않은 한 쪽의 주장을 강요하려 하면 화가 나며, 짐짓 점잔을 빼면서 남을 가르치려 하면 그 때는 키보드에 불이 나지요.(......) 이건 단지 의학 관련 문제 뿐만 아니라, 모든 현안에 대해 그렇게 합니다. 반대로 저는 저렇지 말아야지 하고 언제나 글을 올리기 전에 퇴고를 거듭하지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바드슈님의 방문 자체를 싫어할 리 없습니다. 요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드슈님이 쓰신 글은 오전에는 환자로, 오후에는 약속이 있으니 저녁에 보겠습니다.
Commented at 2008/12/26 10:3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6 21:37
마아......한약이 정말로 효과가 있다고 증명되었다면야 쓰는 것은 문제가 안 되겠죠. 그리고 그렇지 않으니 문제겠지만요. 덮어놓고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영 마뜩찮군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당위성 문제만 나오면, 당위성을 증명하려는 반론은 없고 회피기동만 보이니.......(먼산)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