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꿰뚫는 창이 될 수 있는데 왜 총을 쓰려 하는가

이 글은 제 이전 글에핑백(링크)을 달아주신 분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사실 이전 포스팅과 댓글에서 주구장창 이야기했던 것의 변주일 뿐이니, 안 읽으실 분은 그냥 넘기셔도 좋습니다.

일단, '편의상 구분'을 위해 '양방'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편의상'이라는 이유가 '양방'이라는 말을 합리화시켜주지는 못하거든요. 그냥 혼자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또한 특정 집단 내에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제 글에 핑백을 보내신 이상 서로간에 합의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쓰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거든요. '양방'이나 '의학'이나 음가도 같고, 심지어 타자치기에는 '의학'이 더 빠릅니다. '편의상 구분'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의학'이라고 써야 되는 것 아닐까요? 반쯤은 농담으로 썼습니다만, '양방'이라는 단어는 분명 특정 집단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단어로서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정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못 찾는다면, 상호간에 자기를 대표하는 단어를 써주는 것이 무난하지요. 한쪽은 '의학', 다른 쪽은 '한방' 내지 '한의학'으로 말이죠. (느낌상 '한의학'이 더 상위로 보이긴 하는데, 사실 이 두 단어 사이의 위상 차이를 못 찾겠더군요. 모든 한의사분들이 두 단어를 혼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그 용법을 존중하여 혼용합니다.) 둘 다 서로가 서로를 지칭하는 단어로서 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소통이 끊기기 때문에, 단어 선택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게다가 가치판단이 개입된 단어를 아무 생각없이 입에 주워담다간, 그 가치판단을 개입시킨 쪽의 견해를 수용한다는 느낌까지 들지요. 그런 단어를 상대방에게 쓰도록 강요하는 것은 논쟁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단어 선택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귀찮지만, 소통의 시작을 위해서는 꼭 해야하는 일이지요. 

일단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죠. 위궤양이 일어나는 것을 각종 조직학, 생리학, 병리학적 국제용어를 쓰면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냥 '위벽을 보호하는 방어인자가 약해지고 공격인자가 강해지니까 그렇다'고 설명하면 끝입니다. 실제로 환자가 오면 그림을 그려서 저렇게 설명해드려요. 그 정도면 충분히 위궤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고, 원인을 왜 교정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십니다. 환자에게 설명하는데 그리 어려운 의학용어는 필요 없어요. 그냥 풀어서 설명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한방 쪽에서는 한방의 내용을 그렇게 설명하지 못하고 의학을 빌려서 설명하려는 거지요? 그건 한방이 한방 단독으로는 환자를 설득할 수 없는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요? 환자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가 빠져 있기 때문에 환자를 설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요? 이건 다른 사람이 언급하기 전에 그 학문을 하는 사람이 먼저 생각해야 할 회의적 사고입니다. 자기 학문에 대한 비판적 사고로부터 발전의 싹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한 학문이 어떤 개념(의학의 예를 들면 질병)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시점이 바로 학문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대 한의학에서 한의학적 개념만으로 특정한 병을 설명하지 못할 때, 그 병은 한의학에 있어서 '한계점'이 되는 것이겠지요. 의학 또한 그런 한계점이 분명 있습니다. AIDS는 수많은 의학자들을 무릎꿇렸고, 그래서 혹자는 의학과는 전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빌려와 '신의 벌'이라는 편의적인 설명으로 무마하기도 하죠. 그래도 의학은 의학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한계를 깨고자 노력합니다. 이건 의학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모든 학문이 필연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지요. 발전하지 못하는 학문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다른 학문에 흡수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지요.
그런데 한방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한의학 자체의 발전을 통해 지금까지 한의학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질병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냥 의학을 가져다가 쓰고 있나요. 한의학이 의학을 빌려오지 않고서는 병의 해결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면, 그 한계를 인정하고 의학에 정식으로 힘을 빌려달라 청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한의학이 충분히 모든 병을 설명 가능한데 오로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의학을 빌려오고 있는 것이라면? 한의학자도 의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성을 갖추었으니 이미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 '의학적인 설명'이 한의학에서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는 따로 검증해야 할 문제입니다만.) 왜 '우리들도 동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의사자격증을 다오'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군요. 

혹여 현대의학의 진단기기가 한의학적인 개념을 실증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을 한의학적인 개념에 맞게 개량하여 사용하는 것은 학문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히 가능합니다.(역시나 한의학적인 개념이 맞는지 아닌지는 따로 이야기할 문제입니다.) 전류의 흐름을 측정하는 물리학적 장비는 지금 근전도계나 뇌파측정기로 업그레이드 되어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드신 부정맥을 가지고 말하자면, 부정맥을 일으키는 심장의 이상전기신호를 한방에서 그 나름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심전도 측정기계의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독자적인 진단기기를 만든다면, 그럼 훌륭한 한방진단기기가 탄생하겠지요.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부정맥에 대한 설명이 맞는지 아닌지는, 여러 번 언급했듯이 물론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노력 없이, 엄연히 의학적인 개념으로 설계된 심전도를 그냥 가져다 쓴다? 심전도 측정결과에서 의학적으로 미처 몰랐던 한방적 개념이 검출되고 있던 것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닌 한 심전도는 한의학적인 목적이 아닌 엄연히 의학적인 목적으로 가져다 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단 심전도 기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만약 심전도를 찍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그 필요성은 의학적으로 사유하고 의학적으로 추론한, 엄연한 의학에 의한 필요성이죠. 다른게 아니라 이게 바로 '의학으로 말하고 의학으로 사고하는 태도'입니다. '의학으로 말하고 한의학으로 사고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지요. 정 환자가 그런 병이 있을까봐 불안하다면, 다시 말해 의학적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생각되면, 바로 옆에 있는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끝날 일입니다. 

물론 '조선사람은 총 쓰면 안되냐?'라는 말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사 면허는 '우리는 한의학을 이용해서 환자를 보겠다'는 선언, 즉 '우리는 창만 쓰겠다'라는 선언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되죠. 혹시 의학 커리큘럼이 한의학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학과에서 커리큘럼을 끼워넣는다고 바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죠.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참고자료'이상은 되지 못합니다. '참고자료'로써 하이브리드를 위한 연구에 사용한다면 모를까,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아 아직은 남의 학문체계로 남아있는 것을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그대로 쓰고 있는 현실을 '참고자료'가 변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쓰는 것은 '참고자료'의 올바른 사용법이 아닙니다. '참고자료인 의학에 따르면, 이 환자는 한의학적 필요성보다 의학적 필요성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러므로 의사에게 보내는게 맞겠지' 라는 판단이 바로 참고자료를 올바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혹시 이게 불리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의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듯이, 님도 6년을 바쳐 공부한 한의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봅니다. 자기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 틀리지 않고, 인체의 현상을 다른 학문의 도움 없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면 절대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실제로 창을 쓰는 법이나 창 자체의 개량이 가능하다면 절대 불리한 것이 아닙니다. 비단 한의학에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걸어왔던 길이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지요. 
창은 타제석기로 촉을 만든 창에서부터, 마케도니아의 사리사 창, 란츠크네히트의 파이크 등으로 많은 발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반면에 총은 개발 초기에는 화살에게도 밀릴 정도로 형편없는 무기였지요. 하지만 결국 총은 나름의 발전을 거쳐 비교우위를 획득했습니다. 심지어 바요넷을 만들어 창의 존재의의를 잃게 만들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창의 존재가치가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현대전에도 백병전은 있고, 마침 총이 없다면 창은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무기입니다. 혹시 압니까? 잘 연구하면 나중에는 화약을 달아 신기전으로 만든다던가, 아니면 아예 창의 새로운 사용법을 연구하여 기동포격소녀 나노하(주)같이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창의 발전을 위해 총의 구성요소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창을 만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총을 가져다 '창'이라고 이름만 바꿔서 쓰겠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창의 한계를 인정하고 같이 총을 사용하자고 하면야 논의할 여지는 있지만(이게 바로 의료일원화지요), 그렇지 않고 '원래 우리도 총을 쓸 수 있게 되어있어'라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게다가 현실을 살펴보면 총을 가져다 쓰면서 '창이 최고다'라고 외치고 '창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니, 공감을 이끌어낼 리 만무하지요. 이런 말을 듣기 싫으시다면, 현실에 대한 교통정리를 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일 겁니다.


: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할일없는 분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 소위 '마법소녀'물로 시작한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는 마법소녀의 공식을 깨뜨린 괴작으로 평가됩니다. 마법봉을 휘두르며 기상천외한 마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벗어나, 마법봉으로 무려 포격을 때립니다.(......) 마법봉의 새로운 사용법을 정립했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을리 있나.(쩝) 비슷한 예로, 분명 복장은 마법소녀같은데 실제로는 맨주먹으로 정의를 노래하는 '프리큐어' 시리즈도 있습니다.(=_=) 혹시나 여자아이를 자녀로 두신 부모님이 계시다면, 상기의 두 애니메이션은 시청을 자제시키도록 지도하는 쪽을 권합니다.(;;;;;;;)

by 아이페오스 | 2008/12/26 22:09 |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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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paro1923 at 2008/12/26 23:41
이 양반, 잘 나가다 갑자기 나도하 얘기...;;;
(성우도 '마법소녀'가 아니라 '마포(砲)소녀'로 규정한 물건...)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7 07:47
요즘 세상이 하수상하야 오덕토크를 하고 싶은 욕구가 쌓여 해소되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렇게라도;;;;;;;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12/27 22:11
하긴 그렇군요. (참고로, 저도 나도하 빠라능. 3기 빼곤 까면 사살이라능... 퍽!)
Commented by 바드슈 at 2008/12/27 02:34
이렇게 장문의 답을 받아 본 건 처음입니다;
항상 같은 사람들하고만 이야기하면 점점 단순하고 편협된 쪽으로만 생각이 굳어가는 걸 종종 느낍니다. 기초적인 문제지만 오랫동안 생각도 안 하던 문제를 떠올리게 해주시네요.
많은 사람과 더 오래 이야기해보고싶은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아이페오스 at 2008/12/27 07:52
감사합니다. 오늘 내일은 타지에 나가야 하니 링크하신 글은 나중에 읽겠습니다.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08/12/27 13:24
최근의 오덕질은 마구로스 후론치아...이지만 나노하는 그 명성은 익히 들었어도 접하지는 못했는데...(마찬가지로 페이트도 구해보려는데 어째 구하기가 어렵다능...)

언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이건 비트겐슈타인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나올 문제이긴 한데-이 양반 글이 워낙 어려워서...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12/27 21:09
나노하는, 굳이 보시려면 2기인 A's까지만 보세요.
...3기를 참칭하는 어느 물건(St'S)은 정말 괴작이요, 흑역사...;;;;
덤으로, 윤 본좌의 나노하 관련 포스팅 하나. 은근히 의미심장합니다.
[ http://peiper.egloos.com/3478861 ]

* 비트겐슈타인... 그저 피만 토합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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