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14일
님들 지금 무신론자 무시하나요?
위 기사는 인간복제를 했다고 허풍치는(물론, 근거가 없으니 아직까지는 허풍) 내용인데, 허풍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 기사의 요지 자체는 그냥 넘깁니다.
문제는 기사 중간의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배후에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있기 때문이다. 90여개국에 회원 6만5000여명을 두고 있다는 무신론단체다. ' 라는 말이에요.
일전에 꿈도 희망도 없는 비종교적 회의주의자 인증을 깐 사람으로서, 라엘리안을 무신론자와 동급으로 놓는다는 것에 매우 역겨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무신론에 대해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군요. 무신론자는 그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믿지 않지만 다른 도그마는 믿는 사람들이 분명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일 망정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종류의 도그마에도 경도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는 도그마의 근원적 속성때문인데요. 도그마가 되려면 증명되지 않은 사실 내지 개념을 '있다고 치고'(즉, '믿고') 그 다음 논의를 이어가는 체계이거나, 아니면 일부만 증명된 것을 두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개념으로 상정해야 하지요. 바로 저 '있다고 치는' 것의 대표 주자가 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인격신을 상정하는 체계가 바로 현대의 종교이지요. 따라서 무신론자가 종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도그마적 속성 때문이지, 종교를 대놓고 배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무신론자라면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도그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엘리안들은 '외계인'이라는, 명백한 도그마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 무신론자일 수 없지요. 외계인의 존재는 증명된 적이 없는 개념이에요. 물론 칼 세이건의 '컨택트'에서 나오는 말처럼, '이 넓은 공간에서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이기 때문에 저도 외계인의 존재를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정도로는 생각하고 또 실제로 존재하면 재미있겠다고는 생각하지만, 외계인을 '있다'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아직 증명할 수 없는 사고이기 때문에 도그마입니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뭐 답이 없죠. 이런 자들과 무신론자를 도매급으로 넘겨요? 워워워. 무신론자들을 대체 뭘로 보는 겁니까?
게다가 이 기사는 더 악질적인 요소를 숨기고 있어요.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일단 라엘리안들을 수식하는 말이지만, 라엘리안을 무신론 단체로 봐버리면 무신론자들은 종교나 생명윤리는 다 내버리고 매일 인체실험이나 하는 그런 변태중의 상변태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버린 건 맞지만, 생명윤리까지 버린 건 아니거든요? 그저 남들과 다른 생명윤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기독교와 개신교, 이슬람교 내지 다른 종교들이 각각 다른 생명윤리를 가진 것처럼 말이죠.
이 문구는 다른 의미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데요. 종교나 생명윤리를 같이 쓰는 걸 봐서는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단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물론 지금 종교계에서 생명윤리를 중시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종교만이 생명윤리를 주장하고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파고 들어야 할 듯 합니다. 뭐, 이 문제는 아직 저도 명확한 결론을 내린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제기만 하고 넘어가지요.
'종교를 믿는다'는 말을 가볍게 하면 안 되는 것 처럼, '무신론'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최소한 왜 자기가 종교를 믿는지, 왜 무신론인지 정도는 남에게 설명할 정도는 되어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종교야 상대적으로 이런 설명을 할 부담이 적지만, 무신론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왜 무신론인지를 설명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고, 실제로 세심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남이 상대방을 '무신론자'라고 말할 때 또한 그런 정도의 주의는 기울여여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 점을 망각하면, 진짜 무신론자를 옆에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수가 생깁니다. 바로 이번 기사처럼 말이죠. 이것 참, 식사한 직후에 이런 문구를 보니 속이 안 좋아지는군요. =_=+
추신 : '있다고 치고'. 이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속해있는 체계나 직업 등속이 진짜 실체가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지, 아니면 '있다고 치고'를 기반으로 하는지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후자라면, 도그마에 빠져있다고 봐도 일단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 도그마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실제 그 도그마를 통해 어떤 효과를 본 사람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있다고 친 것'을 '있는 것'으로 바꿔주는 것은 아니지요. 이 과정은 오직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족 : 이런 기사가 아침 댓바람부터 버젓이 포탈 헤드라인에 떠있는 현실에 절망하는 중이므로, '일상의 口丁乙' 카테고리로 분류합니다. 땅땅땅.
# by | 2009/01/14 13:32 | 일상의 口丁乙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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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가 "어떠한 종류의 도그마에도 경도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아이페오스 님의 도그마일 뿐이고 무신론자는 단순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시면 국립국어원에 민원이라도 넣으시던지요.]
무신론이 어떤 사유를 거쳐 나온 개념인지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백과사전에 써있는 말을 법전처럼 적용하려는 태도가 이런 오독을 부릅니다. 무신론의 개념을 뒷받침하는 회의주의와 과학적방법론, 합리주의 등의 사고방식을 통해 '신의 존재를 부정'한 그 과정은 다 빼놓고 '단순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무신론자다'는 결과만을 취하려는 겁니까? '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가를 말하는 글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무신론자'라는 정의를 다시 들고나오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군요. 그런 사전적 정의는 이미 다 excuse되어있는 거 아닌가요?
혹시 신의 존재를 '왜' 부정하려는지는 귀하가 참고하신 사전에서 써있던가요? (물론, 안 써있으니까 위와 같은 댓글을 다셨겠지요.) '사전'이라는 권위를 빌려와서 남을 가르치려하는 오지랖 자체는 인정해드리겠습니다만, 좀 더 고차원의 reference를 가져오세요. 신학자 앞에서 '어린이를 위한 축약본 성경'을 근거로 들어 가르치려는 꼴 아닙니까? 물론 저는 위의 예시에서 상징되는 '신학자'의 위치에 도달하려면 한참 먼 쪼렙이지만, 쪼렙도 설득을 못할 정도면......
흠. 요즘 왜 이런 댓글만 달리는지 모르겠네요. (랄까...이번 댓글 포함 2건+alpha지만 -_-a) 남의 생각을 그대로 ctrl+C ctrl+V 하지 말고 스스로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랑 말을 섞고 싶은데,......차라리 티스토리로 옮긴 글에서 더 생산적인 댓글이 나오고 있으니, 덕분에 옮긴 것이 후회되지는 않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