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과학적방법론

님들 지금 무신론자 무시하나요?

뭐? 라엘리안이 무신론자들의 모임이라고?

위 기사는 인간복제를 했다고 허풍치는(물론, 근거가 없으니 아직까지는 허풍) 내용인데, 허풍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 기사의 요지 자체는 그냥 넘깁니다. 
문제는 기사 중간의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배후에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있기 때문이다. 90여개국에 회원 6만5000여명을 두고 있다는 무신론단체다. ' 라는 말이에요.

일전에 꿈도 희망도 없는 비종교적 회의주의자 인증을 깐 사람으로서, 라엘리안을 무신론자와 동급으로 놓는다는 것에 매우 역겨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무신론에 대해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군요. 무신론자는 그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믿지 않지만 다른 도그마는 믿는 사람들이 분명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일 망정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종류의 도그마에도 경도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는 도그마의 근원적 속성때문인데요. 도그마가 되려면 증명되지 않은 사실 내지 개념을 '있다고 치고'(즉, '믿고') 그 다음 논의를 이어가는 체계이거나, 아니면 일부만 증명된 것을 두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개념으로 상정해야 하지요. 바로 저 '있다고 치는' 것의 대표 주자가 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인격신을 상정하는 체계가 바로 현대의 종교이지요. 따라서 무신론자가 종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도그마적 속성 때문이지, 종교를 대놓고 배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무신론자라면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도그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엘리안들은 '외계인'이라는, 명백한 도그마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 무신론자일 수 없지요. 외계인의 존재는 증명된 적이 없는 개념이에요. 물론 칼 세이건의 '컨택트'에서 나오는 말처럼, '이 넓은 공간에서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이기 때문에 저도 외계인의 존재를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정도로는 생각하고 또 실제로 존재하면 재미있겠다고는 생각하지만, 외계인을 '있다'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아직 증명할 수 없는 사고이기 때문에 도그마입니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뭐 답이 없죠. 이런 자들과 무신론자를 도매급으로 넘겨요? 워워워. 무신론자들을 대체 뭘로 보는 겁니까?

게다가 이 기사는 더 악질적인 요소를 숨기고 있어요.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일단 라엘리안들을 수식하는 말이지만, 라엘리안을 무신론 단체로 봐버리면 무신론자들은 종교나 생명윤리는 다 내버리고 매일 인체실험이나 하는 그런 변태중의 상변태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버린 건 맞지만, 생명윤리까지 버린 건 아니거든요? 그저 남들과 다른 생명윤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기독교와 개신교, 이슬람교 내지 다른 종교들이 각각 다른 생명윤리를 가진 것처럼 말이죠.

이 문구는 다른 의미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데요. 종교나 생명윤리를 같이 쓰는 걸 봐서는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단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물론 지금 종교계에서 생명윤리를 중시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종교만이 생명윤리를 주장하고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파고 들어야 할 듯 합니다. 뭐, 이 문제는 아직 저도 명확한 결론을 내린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제기만 하고 넘어가지요.

'종교를 믿는다'는 말을 가볍게 하면 안 되는 것 처럼, '무신론'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최소한 왜 자기가 종교를 믿는지, 왜 무신론인지 정도는 남에게 설명할 정도는 되어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종교야 상대적으로 이런 설명을 할 부담이 적지만, 무신론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왜 무신론인지를 설명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고, 실제로 세심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남이 상대방을 '무신론자'라고 말할 때 또한 그런 정도의 주의는 기울여여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 점을 망각하면, 진짜 무신론자를 옆에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수가 생깁니다. 바로 이번 기사처럼 말이죠. 이것 참, 식사한 직후에 이런 문구를 보니 속이 안 좋아지는군요. =_=+


추신 : '있다고 치고'. 이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속해있는 체계나 직업 등속이 진짜 실체가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지, 아니면 '있다고 치고'를 기반으로 하는지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후자라면, 도그마에 빠져있다고 봐도 일단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 도그마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실제 그 도그마를 통해 어떤 효과를 본 사람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있다고 친 것''있는 것'으로 바꿔주는 것은 아니지요. 이 과정은 오직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족 : 이런 기사가 아침 댓바람부터 버젓이 포탈 헤드라인에 떠있는 현실에 절망하는 중이므로, '일상의 口丁乙' 카테고리로 분류합니다. 땅땅땅.

by 아이페오스 | 2009/01/14 13:32 | 일상의 口丁乙 | 트랙백 | 덧글(8)

내가 대체의학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

반의학 운동가들의 말을 들을때마다 꼭 성대 언저리에서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말이 있다.

'좋다. 당신들의 말 다 인정하겠다. 그러니 한 번 마음대로 해봐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라'

하지만, 별 문제 안 될 것 같은 이 말은, 사실 의사라면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다. 

왜일까? 1차 의료를 담당한 의사는 적절한 시점에 환자를 전원하지 않았을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실제로 큰 병원으로 옮기는 환자들 중 상당수는 '환자를 붙잡아두고 질질 끈 그 의사 찾아가 뒤집어놓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를 억울하다고는 생각할지언정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의사는 없는데, 그것은 자기 능력 밖의 환자에 대해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의사는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해를 끼친 것이기 때문이다. (주1) 반면에 암이나 다른 중병인지 모르고 복통이나 피로감, 통증같은 증상만을 해결할 요량으로 병원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때늦게 병원에 와서 병을 진단받고, 제 때 치료받을 시점을 놓치게 한 원인에 대해 책망하는 장면을 보기는 힘들다. 

만약 의사가 지고 있는 이러한 책임을 역시 지겠다면, 개인적으로는 의학 이외의 다른 술기가 환자를 다루는 것을 용인할 의향이 있다.(물론, 이 경우에도 다른 술기의 이론적 정합성을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널리 쓰이는 것과, 옳은 것은 분명 다르다.)  이미 이런 식으로 의료정책을 운영하는 나라도 있고, 대체의학자가 환자의 치료를 지연시킨 것을 인정하여 처벌을 받는 사례도 종종 나오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이런 운용이 가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윤리보다는 오늘 저녁을 더 걱정하는 내 특이한 막장성향 때문이고, 절대 다수의 의사들은 이를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장담할 수 있다. 반의학 운동가들이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피해는 남는다. 그리고 그 피해는 사실 얼마든지 예방 가능한 피해이다. 'do not harm'. 환자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의사의 대원칙은, 바로 눈 앞에 마주 앉은 환자를 두고 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모든 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2) 그리고 바로 이 대원칙을, 의사는 반의학 운동가들의 말을 용인해준 까닭에 저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의사는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책임을 져라' 라는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결국 반의학 운동가들의 말을 의사들이 믿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일단 먼저 믿음을 줘봐라" 는 말이 꼭 나온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쪽이 그 당위성을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의 주장을 믿지 못하는 의사들을 책망하는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없다. 믿음을 얻고 싶은가? 의사의 감시를 피해 자기가 생각하는 술기를 마음껏 펼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실증하라. 실증을 통해 당위성을 증명하라. 의사가 반의학 운동가들의 주장을 듣지 않는 것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주장을 용인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원칙의 붕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실증을 통해 이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는 한, 또는 자기가 신봉하는 술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움을 키우는 한, 적어도 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말을 계속 할 것이다.

주1 :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 의사는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도록 훈련되어있기 때문에, 상급병원으로 전원해야 할 정황이나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전원을 하지 않은 점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물론 환자입장에서는 재빨리 전원했으면 좋겠지만, 적절한 전원 시점을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은 1차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로서는 인간 이상의 일을 하라는 무리한 요구이다. 눈으로 척 한 번 보고 병을 알아내라는 식의 주장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단지, 세밀하게 잘 살펴봤으면 놓치지 않았을 정황이나 증거를 놓쳐서 전원의 시점을 늦춘 것이라면, 이것은 의사의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을 하지 않은 것이므로 문제를 삼을 수 있고, 실제로 삼고 있다. 의학은 절대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결과'가 아닌 '(현 시점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가 중시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더 나은 방법론이 나오기 전에는) 절대적인 것임을 명심하면 의료행위에 있어 많은 오해가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주2 :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에서, 생명에 위협이 되는 물리적인 해를 끼치지 말라는 식으로 협의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치료의 지연을 통해 예후에 영향을 끼치는 간접적 위해 뿐만 아니라 경제적 위해까지 포함되는 개념이다. 가격대비 효용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증명이 없음에도, 환자로 하여금 의학적 필요성을 무시하고 자기의 행위를 구매하게 하고 심지어 원래 필요했던 의료행위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등의 행위 또한 의사는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판단한다. 이런 판단의 겉모습과 의사에 대한 편견을 버무려 '밥그릇 지키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한다면 더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사람은 효과가 실증되지 않은 의료행위에 비싼 돈을 쓰겠다는 수요층이므로, 의사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불필요하게 들릴 것이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이 다가 아니라는 점은 알아주셨으면 한다.    

by 아이페오스 | 2008/12/30 14:07 |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내가 해야 할 말은 따로 있다.

이 댓글에서 새삼 느낀 거지만, 자기가 해야 할 말과 제3자가 해야 할 말을 섞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논쟁의 두 당사자 A,B가 있다. A는 현재 사회의 기득권을 획득한 측이고, B는 그 기득권을 가져오려는 자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굳이 덧붙이자면, '기득권'이란 단어에는 어떤 가치판단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기득권이 나쁜지 아닌지는 상호간 논쟁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논쟁 전에 이미 기득권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제3자의 위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B는 A가 기득권을 가질 때 벌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득권을 가져올 시도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러므로 'A가 나쁘다'는 주장을 B가 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논쟁을 지켜보는 제3자로 하여금 B의 편을 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적극 권장해야 한다. 이런 치열한 공방이 문제 해결의 길에 쌓인 흙먼지를 더 잘 쓸어낸다.

하지만, 'A가 나쁘기 때문에 B가 일을 대신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 순간, 제3자였던 C는 의문을 품는다.
"A가 나쁘다는 것은 납득했어. 하지만 그게 B가 A를 대신해야 하는 이유가 될까?"

B는 A를 공격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남의 주목은 비교적 쉽게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주목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 바로 'B가 기득권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이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만, 드디어 제3자들이 A에게서 B로 기득권을 옮겨주는 수고를 감수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게을리한채 'A가 나쁘다'는 말만 계속 하고 있으면, 그것은 기득권의 조정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그저 A의 잘못을 성토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시민운동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이렇게 시민운동의 포지션에 자신을 놓게 되면, 그 포지션에 스스로 갇혀 기득권 획득의 꿈은 멀어진다. 이런 포지션에서는 'A의 기득권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가진 사람들을 동조자로 얻게 되고, 이런 동조자들 앞에서 '그 기득권을 B가 가져오겠다'고 하면 '말바꾸기'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더러운 기득권을 가져오려하다니, 결국 니들도 똑같은 놈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간단하다. 자기의 당위성은 저리 치우고, 남의 티끌만을 언급하라. 이런 이야기를 듣기는 싫은가? 그렇다면 자기가 기득권을 가져와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라. 기득권자의 트집을 잡아 '밥그릇'으로 매도하기는 쉬워도, 자신의 주장에 당위성을 싣지 못하는 한 어느새 자신도 밥그릇의 한 쪽을 쥐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아니, 명심해야겠다.  

출처 : 뇌내망상

추신 : 당위성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과학적 방법론 이외에는 없다. 지금까지 인간현상의 근거를 가장 잘 설명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정 집단의 실증되지 않은 주장을 기반으로 하는 주장은 언젠가 실증된 근거를 기반으로 한 주장에 우위를 내주고 만다.

by 아이페오스 | 2008/12/12 23:37 |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 트랙백 | 덧글(2)

꿈도 희망도 없는 까칠한 회의주의자 인증.

난 얼마나 종교적이며, 또 회의적일까? powered by 꼬깔

 

평소에 이런 문답이나 바톤, 설문같은 건 잘 안하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먼저 시작하신 분은 유명 블로거이신 경우가 많고, 여기에 그저 문답에 대한 응답 같은 걸로 트랙백을 보내는 것은 트랙백을 남용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한 유명 블로거가 제시한 화제거리에 기대어 알량한 조회수 장사나 하려는 시도같이 생각되기도 해서 말입니다. 뭐, 자격지심이긴 합니다만. (-_-)a

 

하지만 꼬깔님께서 제시하신 내용은 그냥 지나가기에는 너무 매력적이군요. (하악하악) 마침 최근에 과학적 방법론과 회의주의에 대해서 맛을 보는 정도의 포스팅을 써넣기도 했는데, 딱 좋을 때 좋은 설문조사를 발견했네요. :D 그래서 이번만큼은 금기를 깨고 다른 분들께 널리 소개도 할 겸 해서 설문을 납치해왔습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설문 내용]

1. 종교적 방식의 양육
2. 부모의 신앙심
3. 낮은 교육 수준
4. 여성
5. 대가족
6. 부모와 갈등을 겪지 않음
7. 나이가 어림

 

[답변]

1. X : never!!! 아버지께서 저한테 가장 먼저 가르쳐주신 것은 '스스로 생각하라!!' 였습니다. 아아 아버지.

2. X : 연말정산때만 되면 종교인이 되시는 듯 합니다만(......), 집에 종교적 상징물도 없고, 운명을 남에게 정해달라고 하는 분들도 아니시니 부모님들께서는 신앙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고 확증합니다.

3. X : 일단은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니, 학벌사회에서는 일단 상위 클래스라고 볼 수 있겠군요. 물론, 사회와 자연의 현상을 해석하고 관찰하며 결론을 도출하여 내면화하는 진짜 지식이 존중받는 사회라면 절대 상위에는 못 들 겁니다만.  

4. X : 다른 포스팅을 보시면, 오는 여성분도 쫒아내는 최악의 남성상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아실 수 있습니다.(먼산)

5. X : 동생 하나밖에 없는 전형적 핵가족입니다. 게다가 남동생.(아앍) 동생 하나쯤 더 있으면 좋았을텐데...

6. X : 좀 미묘한데, '반항'은 하지 않지만 '갈등'은 합니다. 특히 뉴스시간에 교육문제나 정치관련, 특히 민주당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말이죠.=_= 물론 MB나 MS가 나오면 대동단결합니다. (......) 설문에서 말하는 갈등이란 이런 갈등이 아니라고 보여지니 X.

7. X : 꺾인 20대가 나이가 어리다고 하면 아마.......(이하생략) 물론 아직 덜 떨어졌다는 의미에서는 어린게 맞습니다만. =_=;;;

 

......이거야, 답변하고 보니 natural born skeptic 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군요. 아, 운명이란 표현은 그것의 실재를 믿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학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 뿐입니다.(=ㅂ=) 다른 분들은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지는군요. ^_^

by 아이페오스 | 2008/12/09 11:50 |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 트랙백 | 덧글(16)

귀찮고 까다롭지만, 그래서 비로소 원칙이에요.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rule을 정하자는 이야기마저도 '의도가 있다'는 말로 거부하려는 시도가 있다. 논쟁의 기반을 닦는 rule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논쟁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런 시도가 셀 수도 없이 벌어진다.

그런데 상대방의 말이 숨겨진 의도가 있다면, rule을 정하자는 이야기를 거부하면서 '의도가 있다'는 말을 하는 그 행위도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공정한 rule을 정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야기에 불순함이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지 말자는 이야기 또한 불순함이 서려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회의주의적 사고가 가능하다면, 남이 이것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기 논리의 허점을 찾을 수 있음이 지당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해당될 이야기를 일말의 의혹도 없이 입에 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상대방의 논점 자체를 분석하려 하지 않고 논점을 말하는 상대방의 인격이나 사회적 위치, 고정관념 등을 이용하여 때리는 것이 관행이어서일까? 이런 수법은 일견 유효하게 보인다. '의도가 있다'는 말을 통해 관전자는 주장의 내용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주장의 타당성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이런 수법으로 논쟁의 판을 깰 수는 있어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런 수법이 논쟁의 주장을 넘어 논쟁의 전제를 세우는 것에 까지 쓰여지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기왕 이전 글에도 써먹었으니, 이번에도 '의료보험 체계 편입의 우선순위'문제를 끌어와보자. 나는 이전 글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는 세태를 개탄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글에 붙은 댓글 토론을 통해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질환에 대해 보장을 해 줄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가장 효율적인 의료재원 분배를 위해, 우선순위는 국민들의 의료서비스 수요가 아니라 환자들의 의학적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rule'을 제시했다. 이렇게 확고한 원칙을 세워야만 (주1) , 직능간의 파워게임과 여론의 향배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중재자, 그리고 그 중재자에 편승하여 자신의 논리로써 당위성을 입증하는 책임을 방기하여 해이에 빠지는 논쟁 당사자들의 출현을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확고한 원칙 하에서 '그 원칙이 우리 직능의 편이기 때문에 우리 직능에 더 많은 지원을 해 줘야한다'같은 논쟁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논쟁의 매커니즘이 사실 이렇다.)

주장의 가부는, '누가 더 지지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타당한 말을 하는가'로 결정된다. 타당하기 때문에 지지받는 것은 맞지만, 지지받기 때문에 타당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후자의 경우가 많아 보이고 또 맞아 보이는 것은, 확고한 원칙이 없어 타당성이 담보되지 않은 주장이 논쟁 시장(?)에 출시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칙과 이익이 상충할 때, 원칙을 버리는 선택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어느 곳에서나 있는 일이고, 따라서 논쟁 당사자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원칙의 필요성 자체가 망각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최근에는 그것이 아예 주류담론이 되어버린 것 같아 절망.) 지금이라도 확고한 원칙을 외치는 중재자의 자세가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주장을 인정하지 말고, 그 주장의 타당성을 실증된 원칙을 통해 판단하면 된다. (주2)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의 참모습이 아닐까?


주1 : 역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원칙이란 것도 확고하게 정의되기 전에는 논쟁의 대상이며, 내가 주장한 rule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굳이 언급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중질환자는 자기가 알아서 치료하도록 내버려두고, 보험료를 내는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 자기가 낸 세금은 자기가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가 된 세상에서, 의료분야라고 이런 류의 생각이 발호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렇게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원칙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주2 : 이전 포스팅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원칙의 실증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쓰면 오해를 살 것 같으니 굳이 첨언하자면, 과학적 방법론은 무슨 특정한 이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통해 현상을 분석하는 사고방식'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원칙의 실증 뿐만이 아니라, 주장의 근거를 실증하는 것 역시 이래야 함은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졸필을 엮은 바이다. 원칙이란 논쟁 당사자 모두가 합의할 수 있어야 하며,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공정성을 가장 잘 제공해줄 수 있는 사고방식이 바로 과학적 방법론이다.  

사족 : 실제로 이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글을 쓰고 보니 사회 전체에서 합의된 원칙을 '대원칙', 그리고 개별적인 논쟁에서 합의된 원칙을 '소원칙'이라 생각하면 원칙을 정하는데 좀 더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소원칙이 논쟁 당사자들간에 합의되었더라도, 그것이 논쟁의 무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당사자들간에 논쟁을 회피하고 이익을 나눠먹기 위해서 설계되었다면, 그것은 대원칙에 어긋날 것이다. 철학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 인생이라 이미 다른 학자들이 말한 것을 이제야 깨달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ㅇ>-<

by 아이페오스 | 2008/12/08 11:24 |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 트랙백 | 덧글(4)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정치'

최근 종합병원2라는 M본부 드라마에서 담도염과 췌장암 재발이 병발한 환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평소 드라마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무미건조한 생활이지만, 이 에피소드가 방영된 날은 우연히 근무하는 관사에서 본가로 몸을 옮겼을 때라 가족들과 진득하게 TV앞에 앉아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두가지 병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식으로 내용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제로는 두 질환 모두를 염두에 두고 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드라마에서는 수술을 감행하는데, 사실은 하면 안된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이글루에서 종합병원2에 대한 의학적 고찰을 하고 계신 Hwan님께서 더 자세히 설명하셨으므로 꼬꼬마 새끼의사의 잡설은 여기까지.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것을 '의학적 견지에 비추어볼때 이는 선택할 옵션이 아니다.'라고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이 바로 의사의 역할이다. 사실에 대해 키우지도 말고, 줄이지도 않으며, 오로지 실증된 진실을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 의견의 기초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가치판단을 하지 말고, 기초내용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치판단을 거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전문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의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면 자기 분야에서 누구나 하고 있고, 또 해야 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특히, 이 덕목은 사회를 조율하는 정치가가 가져야 할 태도이다. 국민의 욕망은 실로 다양하며, 이를 구현화하고자 하는 동기도, 수단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욕망은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떤 기준으로 조율해야하나? 조율의 전문가인 정치가는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럼 그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자. 조율의 기준은 물론 정치가의 포지션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어느 포지션에 서있던지 간에, 꼭 지켜야 할 원칙은 서로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중재의 필요성은 분쟁의 어느 단계에서 발생하는가? 중재라는 이름으로 정치의 권한이 남용되지는 않는가? 적절한 중재의 개입시기는 어느 때인가? 중재할 때의 기준은 어느 정도에 세워야 할 것인가? 기준은 어떤 근거로 정당화시켜야 하는가? 이것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의문이 나오겠지만 내 깜냥으로는 일단 이 정도다. 

이 중에서 내가 특히 관심이 있는 부분은 바로 중재의 시기와 기준의 근거이다. 사회 구성원간 다툼이 벌어졌을 때, 정치는 개입한다. (개입 수단은 립서비스에서 공권력까지 다양하겠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그런데, 다툼이 있으면 무조건 정치가 중재에 나서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토론의 장만 마련하는 웨이터 정도의 역할만 할 것인가? 돈 계산이 틀렸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논쟁은 그냥 놔두면 된다. 하지만 싸우는 집단이 자위대와 특기대, 섹트 테러조직이라면? (오시이 마모루 作 '인랑'에서 따왔습니다. =ㅂ=) 다툼의 피해는 논쟁에 나서는 단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지게 된다. 따라서 논쟁을 방임할 경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면 그 때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중재의 시기는 이 쯤 해두고, 개입했을 경우 중재의 근거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자. 분쟁은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그 모든 것을 다 통제할 능력은 없다.(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집단은 하나같이 역사적으로 도태되는 종말을 맞았거나, 맞는 중이다.) 따라서 국가가 중재를 시도할 때의 문법은, 분쟁 당사자들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법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 중재자가 가져야 할 문법은 어떤것이어야 하는가? 먼저 분쟁 당사자 양 쪽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논쟁의 대전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에 벗어나는 주장은 모두 폐기하도록 강제해야한다. 이런 대전제를 '원칙'이라 바꿔 말해도 상관없다. 생각보다 많은 논거가 이 기준에서 탈락한다. 예를 들어, 올해 보험재정 흑자분을 의학적인 필요성이 적은 분야 (이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는 상관없다.)에 먼저 제공해서 의학적 필요성이 큰 분야가 반발했다고 하자. 이 때 반발한 측의 주장에 대해서 반론이랍시고 흑자분을 제공받은 쪽이 '우리가 받는 것에 신경쓰기 전에 기아에 허덕이는 후진국에 지원하지 않는 세태부터 고발하는 것이 어때요?'라고 말했다면, 이는 명백히 논쟁의 대전제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부족한 한국 보험재정은 보험의 취지에 맞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자기 딴에는 비슷한 논리라고 들었지만, 이런 논법은 논쟁에 일부러 다른 화두를 섞어 논쟁을 단절시키는 매우 나쁜 토론 태도이다.

그 다음에 각 논쟁 당사자의 주장과 그 논거를 듣는다. 주장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은 일단 유보해야한다. 이 시점에서는 오로지 논거의 정합성만을 분석해야 한다. 이게 쉬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논거의 사실관계가 명백히 틀린 경우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가 끝날테지만, 논거라고 든 것이 실은 논거가 아니라 자기들이 주장하는 내용에서 자가발전한 것일 수도 있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시도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인정하기 어려운 일부 집단의 상식을 논거로 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그 논거의 근거에 대한 분석이 필요해진다. 이 분석이 잘못되면, 상대방으로부터 '국가 권력이 한 쪽을 편든다!!'는 질시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중재는 실패하고, 정치는 그저 특정 이익단체의 대변자 노릇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럼, 그 분석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분석의 바탕부터가 공정하지 못하면 분석의 결과도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논쟁 당사자 모두에게 공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과학적 방법론'이 등장한다. 인류가 생각해낸 여러 수단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공정성을 제공해준 도구이다. 과학적 방법론이란 그저 실험실에서 시약을 넣고 DNA를 검출할 때나 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내가 10시에 나가면 내 걸음으로는 11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거야.' 같이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판단마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추론이다. 이를 이용하여 논거의 정합성을 분석해야만 공정성이 확보된다. 첨언하자면, 이 분석은 '이 쪽의 주장이 맞다'라는 증명이 아니라 '이 쪽의 주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도권의 중재 하에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증명을 위한 과정이다. 이를 혼동하고 근거가 맞다고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 것 마저 충족시키지 못하는 주장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발견도 아니다. 우리는 매일 TV에서 한 번 씩은 한 쪽의 일방적인 억지 주장을 듣고 있지 않은가.)

논쟁 당사자간 합의할 수 있는 대전제를 세우고, 양 측의 주장이 실증된 논거를 바탕으로 주장되고 있다면, 이제 양 측의 주장은 동일한 위상을 획득한다. 이제 여기서 정치의 개입이 중요해진다. 두 주장이 모두 제3자가 보기에 실증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정치가는 자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결정은 물론 선택받지 못한 한 쪽의 반발을 부르게 되겠지만, 이를 감수할 능력이 없다면 애초에 정치가가 되겠다고 나설 자격도 없다. 게다가 제3자가 보기에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들어 결정했다면, 이 판단의 정당성을 근거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는 상당 부분 이렇지 못하기 때문에 '편파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어떤 사안이든 숙고하지 않고 성급히 개입하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망친다. 한 쪽의 주장이 동일한 위상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양 측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원칙만을 일깨워줘도 자연스럽게 일이 풀릴 수 있다. 하지만 논쟁의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거나, 원칙을 무시하고 다수가 원하는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채택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치력의 남용을 부른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관례가 과도한 정치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공권력의 비대화를 유발한다. 이는 정치가가 표를 쫒아 원칙을 저버린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게다가 도덕적 해이에 빠진 정치가의 행위를 오로지 자기 집단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용인한다면 그 집단 또한 공범이 된다. 정치가들에게 '포퓰리즘'의 맛을 알게 해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횡행하는 나라라면, 원칙을 무시하고 논쟁을 결정지은 다음에 그 결정을 (나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술수로 기정사실화할 수 있다. 이런 정치를 용인해주는 나라에서는, 정치가는 언제나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지만 절대로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원칙을 정하는 것. 그리고 현상을 공정하게 볼 수 있는 판단력. 그것이 정치가가 사상보다도 먼저 가져야 할 덕목이다. 그리고 그 원칙을 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열린 마음으로 구하고, 그들의 의견을 토대로 사안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사안을 평가하되, 그 평가 근거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공정성을 획득해야 한다. 여기에 '그 주장은 이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고려되어서는 안되는 옵션입니다'라는 판정을 할 수 있는 심지까지 있으면 더욱 좋다.(주) 그렇게 만들어진 원칙이 쌓이고 쌓여 그 나라의 시대정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정신이 세계의 common sense와 합치한다면, 그 나라는 세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 구태여 다시 말하지만, 모든 전문가는 매일 그 일을 하고 있다.

추신 : 저는 정치학이나 사회학같은 것과는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소시민으로서 정치인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감상일 뿐입니다. 보시면 어떤 새로운 내용도 없는 당연한 말의 나열입니다. 제목부터 '당연한 정치' 아닙니까. -ㅂ-

by 아이페오스 | 2008/12/07 19:51 | 편견으로 그득한 위험한 사상 | 트랙백 | 덧글(6)

'한방'에 대한 검증의 패러다임을 설정하는 것에 대한 소고(小考)

'연예인 장진영씨가 한방 치료로 위암치료한다'는 기사에 줄줄이 낚인 댓글을 보고 든 잡상. 본문을 보면 분명 항암치료와 한방치료를 병행하고 있다고 나와있는데, 제목을 저렇게 뽑아놨으니 한방 치료로 위암 치료에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기자의 의도가 이게 아니라면 기사를 잘 못 쓴 것이고, 만약 의도한 바가 맞다면 분명 항암치료를 하고 있음에도 특별히 한방치료만을 부각시킬만한 근거를 밝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려는 바는 기자의 논술실력이 아니라 댓글에서 싸우고 있는 논의되고 있는 '한방'에 대한 화두이므로, 일단 제쳐놓겠다.  

한방 쪽 사람들에게 '검증해보자'라고 말하면, '우리 치료방법에 대해 이중맹검을 실시해보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도 실제로들 그렇게 한다. 한방에 관련된 논문들 중에서 약제의 효과에 대한 논문이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나, 한방에 대한 기사에 달리는 의사와 한의사, 그리고 서로 양쪽을 옹호하는 시민들간의 리플대전에서 '실제로 효과가 있지 않는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검증에 대한 다수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주1)

하지만, 그런 검증은 '한방에서 쓰는 진료 tool'의 효과에 대한 검증이지, '한방적 원리(또는 사상체계)' 그 자체에 대한 검증이 아니다. 한방의 효과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한방적 원리에 의해 설계된 약제와 침술 등의 진료 tool이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한방적 원리가 참인 반증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위의 주장이 참이 되려면 '약제나 침등이 정말 한방적 원리에 의해 작용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약간의 회의주의를 적용하면 알 수 있다. 한방에서 사용하는 진단방법, 약제, 침 등의 진료 tool 이 정말로 한방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한방적 원리가 아니더라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가 확연해져야 한방의 진정한 효과가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2)

바로 이 점에 대해 결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방을 그 자체로 완전한 치료체계로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남아있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중 하나이며, 그 이유는 내가 의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훈련받아온,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연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방적 사상체계의 정합성 증명. 바로 이것이 한방이 미래의학의 패러다임을 선도하기 위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핵심적 명제이며, 이에 실패한다면 그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주3)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그것은 한방에 대한 편견과 적대적인 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폐기되어왔던 동서고금의 무수한 사유들처럼 과학적 검증에 의해 유효성을 상실한 주장이기 때문에 폐기되는 것에 불과하다.

제언 : 따라서 바로 이 점이 한방에 대한 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양방과 한방의 부작용 여부'나 '양방의사들의 잘못된 행태' 등을 들면서 한방의 존재이유를 역설하려는 시도에 휘둘리고 만다. 이런 지엽적인 이슈에 일일히 대응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자기변호적인 주장을 펼 수밖에 없고, 이슈 파이팅을 걸어온 측은 바로 그 말을 부각시켜 '밥그릇 싸움'이라는 매도를 통해 반의사정서에 기대려 할 것이다.(이전 글에도 쓴 적이 있지만, 자기들 또한 밥그릇 싸움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런 논리전개가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반증해주는 것이 아님에도!!)  이러한 싸움 방식은 핵심에 대한 검증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양 직능간에 오해와 편견의 골만 키우는 비생산적인 말싸움에 불과하다. 한방적 사상체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방과 현대의학이 접점을 찾을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랄 뿐이다.

주1 : 나로서는 한방적 원리에 대한 검증 이전에, 한방에서 쓰는 진료 tool 중 현대의학에서 알게 모르게 빌려간 것이 있는지의 여부부터 먼저 검증하여 순수한 한방적 치료의 치료효과를 논하는 것이 순서라고 보지만, 그것을 제하고서라도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 일단 치료효과가 있다는 말을 인정하자. 인정하더라도 그 다음 논의로 넘어가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또한 현대의학에서 빌려간 것 덕분에 한방치료가 더 효과적이 되었다는 반론이 있어도 상관없다. 그것은 기실 반론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치료를 위해 한방이 현대의학에 통합될 필요가 있다는 자기고백이기 때문이다.)

주2 : 나는 한방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냐면 확실하게 사상체계가 '의미없다'고 결론나지 않았으니까.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가지론자들이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 처럼 나도 한방에 대해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기독교최종결전병기 리처드 도킨스가 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딱 그 정도로 가능성을 인정한다.)  한방에서 이용하고 있는 tool이 모두 한방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판정났을 경우를 가정하여 '한방'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던 진료 tool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미리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전량폐기보다는, 혹독한 과학적 방법론과 회의주의의 세례를 통과하여 살아남은 것에 한해 현대의학체계의 하나로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한방적 사상체계가 진료 tool의 발전을 가로막은 요소가 있다면(사상에 의해 유용한 개념의 확장이 더뎌지는 현상은 언제나 있으므로 이 경우 또한 상정해야한다.), 현대의학체계 아래에서 더욱 발전할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일지도.  

주3 : 혹은 특정 지역의 우호도나 법적 테두리 등의 보호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다. 이 경우 특정한 나라나 문화권에서는 계속 일정한 영역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고립되거나 '그 나라의 전통 치료법' 등으로 半관광상품화된다면 '의학'이라는 이름을 걸기도 창피해지지 않을까? 나라면 내가 속해 있는 체계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지구의 의학은 소위 물질론과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미개한 방법으로 병을 치료하고 있군'이라는 말을 하면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치료를 지구인에게 선사한다면, 나는 좌절감과 함께 의사면허를 내놓고 외계인의 의학을 배우려 뛰어다니게 될 것 같다. )  


사족  : '약제나 침등이 정말 한방적 원리에 의해 작용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물론 과학적 방법론을 거친)을 제 깜냥으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일단 글을 썼지만, 이것은 제가 풋사과이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이미 다 결론이 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저는 이 글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이 글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셨을 분들께 머리숙여 사과하면서 반성하겠습니다. (_ _)

by 아이페오스 | 2008/11/25 18:50 |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 트랙백 | 덧글(16)

어른들을 위한 재미없는 우화 한 토막

19세기 말, 아프리카 남부의 어느 작은 나라에 위대한 주술사가 있었다. 그는 몇 백년 전부터 이어져온 주술사 집안의 후예로서, 아프리카의 주술철학을 집대성하면서도 이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널리 보급하여 이 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이전의 도제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주술사의 대량 양산이 가능해지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 자주 주술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느날 주술사가 사는 나라에 서양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온 의사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토착신앙이 강한 원주민들로부터 '양귀신 들린 자들'이라는 모멸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환자를 치료하는데 매진하였다. 그리고 곧 이 나라의 토착의학에서 현대의학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이를 연구하려 하였다. 하지만 주술사는 이들의 시도를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를 품어주는 어머니 신을 말살하여 아프리카를 지배하려는 서양귀신들의 거대한 음모'로 생각하여 격분했다. 그래서 자신이 집대성한 주술철학과 그것에 기반한 약을 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정부에 건의했고, 주술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국민들의 반발을 살까 두려웠던 정부는 '전통의학 보호'라는 명분을 들어 그 주장을 인정해주었다.  

시간은 흘러흘러 21세기. 굴곡 깊은 역사를 지나 수많은 싸움과 논쟁이 지나간 후에 이 나라는 전통문화를 지키면서도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은, 아프리카에서도 몇 안되는 안정된 나라가 되었다.  물론 정부의 전통문화 보호 시책에 따라 주술사들이 시행하는 전통의학도 표표히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전통의학을 다루는 주술사들도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면서, 사상체계는 지켜가면서도 서양의학의 장점은 받아들이자는 사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독의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전통적인 약초 사용 의식을 꼭 지켜야만 약의 효과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사조에 따라 한 주술사가 아침 이슬만을 모아서 탕제를 끓이거나, 약초를 짓이겨 때묻지 않은 처녀의 배에 바른 다음 환자가 그것을 핥아 먹도록 하는 등의 전통적인 약초 사용 의식을 배제하고, 약을 간편하게 복용할 수 있도록 정제하여 환약을 만들었다. 이 약은 옛 방식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고, 이 약의 효과에 주목한 이 나라의 의사들은 이 약의 효과를 검증하여 상품화하자고 제안했으나 '서양귀신에 씌인 자들'을 태생적으로 싫어하던 이 주술사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의학 보호법'을 들어 이들의 주장을 내쳤다. 비록 형태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자기가 만든 약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선배들의 업적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서양의학자'들이 쓰는 약들에는 부작용이 많다는 환자들의 인식도 있기 때문에 이 약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같은 '서양의학자'들을 몰아내려는 계산도 약간은 있었다.

'전통의학 보호법' 에 따라 자국 의사들이 전통의학에 대해 어떤 언급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약을 외국에 소개하는 논문 또한 발표될 수 없어 이 약은 주술사들끼리만 쓰게 될 운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마침 아프리카 관광을 온 한 과학자가 이 약을 발견하고, 약을 몰래 반출한 후에 그 효과를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입증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게다가 그 약제가 '서양의학'에서 나온 '부작용 많은 약들'보다도 더 효과가 좋고 해가 없다는 것이 임상실험에 의해 밝혀졌다. 전 세계의 의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당연히 이 약을 수입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 양복을 입은 '서양귀신'들이 벌떼처럼 밀려들어왔다.  이 약을 만든 주술사는 순식간에 전세계 사람들에게 구세주같이 떠받들여졌고, 여러 나라의 매스컴, 과학자, 의사들이 이 나라를 찾아 전통주술과 전통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면서, 이 약이 나라를 홍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 정부는 주술사에게 각국을 돌면서 강연을 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프리카의 전통주술을 널리 알릴 기회라고 생각한 주술사도 이에 동의하여 각국을 돌며 TV 카메라 앞에서 전통주술을 시전했다. 그런데 주술사는 언제나 프로그램이 끝날 때 쯤이면 "이 약을 쓰려면 아프리카의 정신을 이해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써서는 안된다. "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노력을 들여 만든 약이 아프리카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의학자'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쓰여져 약의 신성함을 훼손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외국 의사들에게 받아들여졌을까? 혼란의 시대를 거쳐 모든 도그마가 파괴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상식이 된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런 주술사의 주장이 이상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약은 아프리카의 주술체계 특유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약이니 당연히 이를 공부한 사람만이 써야한다." 는 주술사의 주장에 대해 "당신의 그 주장부터 검증해보자. 정말 아프리카 주술 특유의 원리때문에 이 약이 효과가 있는 것인가? " 라는 반론이 날아왔다. 전세계의 언론들은 이 주술사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사람', '낡은 사고방식을 강요하여 환자의 이익을 갈취하려는 사기꾼', '서양의학이라는 말로 자기 나라를 현대의학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분리주의자' 등으로 매도했고, 코미디언들은 이 주술사의 옷차림새나 어눌한 영어 발음, 주술사의 나라가 힘들여 유지하고 있는 전통을 조롱거리로 삼았다. 주술사에게 열광하던 세계의 여론은 금방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게다가 그들은 조롱에 그치지 않고 그 약을 뿌리부터 분석하여 '현대의학'의 효과적인 무기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이 작업에 성공하여 양산과정에 들어간 제약회사는 전 세계에 이 약을 팔기 시작했고, 곧 주술사가 사는 나라의 의사들도 이 약을 수입해서 환자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약의 로열티는 맨 처음 약제를 만든 주술사에게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제약회사는 '아프리카의 주술 원리'가 아닌 과학적 기전을 통해 이 약에 대한 특허를 얻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주술사는 자신의 고집 때문에 자기가 만든 약이 외국에서 팔리는 것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역시 서양귀신들은 무서운 놈들이다. 아프리카의 대지가 주는 풍요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독자적 사고방식을 자기들의 잣대에 끼워맞추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다." 라고 울분을 터뜨리며 쓸쓸히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우리 나라의 국민들 만이라도 신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이미 서양귀신들에 의해 더렵혀진 약을 자국 의사들이 수입해서 쓰지 못하도록 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 노력은 결실을 맺어, 이 나라에서 문제가 된 약의 특허는 허가되지 않았고 그 약은 주술사들만이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후배 주술사들이 이 약으로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보며, 주술사는 어머니 대지신의 품에 안겼다.  


뒷 이야기 하나 : 나중에 이 사태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아프리카의 한 저널리스트는 "애초에 자국 의사들에게 연구를 허용했으면, 낙후된 우리나라의 의학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림은 물론, 향후 의학의 흐름을 우리 쪽으로 가지고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정부의 전통의학 보호법이 오히려 우리나라의 의학발전을 저해하는 방해물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라고 말했다가 몰매를 맞고 '양귀신에 쓰여 전통을 무시하는 후레아들놈' 소리를 들으며 외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뒷 이야기 두울 : 후에 이 나라에서 민족주의적 가치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정치인은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외국에서 우리 나라 주술사가 만든 약을 쓰고 있다. 우리를 괴롭혔던 서양의 의학이 드디어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전통의학을 받아들인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정치적 열광에 휩싸인 국민들에게 진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들이 이 말을 믿게 되었다.

by 아이페오스 | 2008/11/05 22:07 |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화상침?

속칭 '재야의학계'라고 하는 분야에서 실적을 쌓아왔다고 하는 구당 김남수 선생을 다룬 국영방송의 프로그램이 전파를 탔다 한다.
집에 TV가 없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본 사람의 말이나 뉴스를 취합하면 뇌졸중에 맞는 응급 침이 있다고도 하고 화상도 침으로 낫는다고 한다. 참 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놀라운 업적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기술이 대가의 사망으로 사장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TV에서 말하는 모든 내용에는 검증 과정이 들어있지 않은 듯 하다. (이 바닥에서 검증이란 '논문'을 말하는 건 기본으로 깔고 이야기한다.) 침 시술을 받은 환자가 그 뒤 의학적 응급처치나 화상치료 등을 받았는지 아닌지, 의학적 처치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하면 그 환자의 회복기간이 자연회복기간에 비해 얼마나 짧아졌는지 등등......조금만 생각해도 논문을 만들 거리는 너무나 많이 쏟아져나온다. 논문 한 편 써본 적이 없는 나도 이 정도 생각을 하는데, 매일 논문에 파묻혀 생활하는 분들은 대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이 프로그램을 지켜보았을까.

의사는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최선의 방법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제공하는 의학적 소견을 거부할 권리는 당연 환자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방법보다 저런 방법이 탁월하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그 쪽으로 환자분을 전원시킬 것이다. 하지만 저 침술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병이 나았다는 환자분들의 칭송 뿐. 그렇기 때문에 그 칭송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객관화하는 데이터가 빨리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환자를 다루는데 있어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의사의 입장에서는 환자들에게 저런 침술을 추천해 줄 수 없다. TV를 통해 정보를 얻고 새로운 것을 접해보고 싶은 환자와, 그것에 대해 과학적 믿음을 가지지 못해 소개해 줄 수 없는 의사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또 멀어져간다. (=_=)

추신 : 듣기로, 구당 김남수 선생은 한의사 면허가 없고 한의학계에서도 좀 마이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음. (-_-)a

by 아이페오스 | 2008/09/14 00:00 | 막장의사의 발로쓰는 의료이야기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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