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뭔가를있다고치고넘어가려면찜찜하지않습니까
무신론자는 어떤 종류의 도그마에도 경도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는 도그마의 근원적 속성때문인데요. 도그마가 되려면 증명되지 않은 사실 내지 개념을 '있다고 치고'(즉, '믿고') 그 다음 논의를 이어가는 체계이거나, 아니면 일부만 증명된 것을 두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개념으로 상정해야 하지요. 바로 저 '있다고 치는' 것의 대표 주자가 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인격신을 상정하는 체계가 바로 현대의 종교이지요. 따라서 무신론자가 종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도그마적 속성 때문이지, 종교를 대놓고 배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무신론자라면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도그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엘리안들은 '외계인'이라는, 명백한 도그마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 무신론자일 수 없지요. 외계인의 존재는 증명된 적이 없는 개념이에요. 물론 칼 세이건의 '컨택트'에서 나오는 말처럼, '이 넓은 공간에서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이기 때문에 저도 외계인의 존재를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정도로는 생각하고 또 실제로 존재하면 재미있겠다고는 생각하지만, 외계인을 '있다'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아직 증명할 수 없는 사고이기 때문에 도그마입니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뭐 답이 없죠. 이런 자들과 무신론자를 도매급으로 넘겨요? 워워워. 무신론자들을 대체 뭘로 보는 겁니까?
게다가 이 기사는 더 악질적인 요소를 숨기고 있어요. '종교나 생명윤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일단 라엘리안들을 수식하는 말이지만, 라엘리안을 무신론 단체로 봐버리면 무신론자들은 종교나 생명윤리는 다 내버리고 매일 인체실험이나 하는 그런 변태중의 상변태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버린 건 맞지만, 생명윤리까지 버린 건 아니거든요? 그저 남들과 다른 생명윤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기독교와 개신교, 이슬람교 내지 다른 종교들이 각각 다른 생명윤리를 가진 것처럼 말이죠.
이 문구는 다른 의미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데요. 종교나 생명윤리를 같이 쓰는 걸 봐서는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단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물론 지금 종교계에서 생명윤리를 중시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종교만이 생명윤리를 주장하고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파고 들어야 할 듯 합니다. 뭐, 이 문제는 아직 저도 명확한 결론을 내린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제기만 하고 넘어가지요.
'종교를 믿는다'는 말을 가볍게 하면 안 되는 것 처럼, '무신론'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최소한 왜 자기가 종교를 믿는지, 왜 무신론인지 정도는 남에게 설명할 정도는 되어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종교야 상대적으로 이런 설명을 할 부담이 적지만, 무신론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왜 무신론인지를 설명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고, 실제로 세심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남이 상대방을 '무신론자'라고 말할 때 또한 그런 정도의 주의는 기울여여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 점을 망각하면, 진짜 무신론자를 옆에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수가 생깁니다. 바로 이번 기사처럼 말이죠. 이것 참, 식사한 직후에 이런 문구를 보니 속이 안 좋아지는군요. =_=+
추신 : '있다고 치고'. 이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속해있는 체계나 직업 등속이 진짜 실체가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지, 아니면 '있다고 치고'를 기반으로 하는지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후자라면, 도그마에 빠져있다고 봐도 일단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 도그마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실제 그 도그마를 통해 어떤 효과를 본 사람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있다고 친 것'을 '있는 것'으로 바꿔주는 것은 아니지요. 이 과정은 오직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족 : 이런 기사가 아침 댓바람부터 버젓이 포탈 헤드라인에 떠있는 현실에 절망하는 중이므로, '일상의 口丁乙' 카테고리로 분류합니다. 땅땅땅.
# by | 2009/01/14 13:32 | 일상의 口丁乙 | 트랙백 | 덧글(8)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